이른 가을의 꽃놀이

미당 향기 그윽한 전북 고창

박상준 제공

이제 가을 냄새가 곳곳에서 피어오른다. 오후의 태양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한밤의 들숨 사이로 계절의 향이 스민다. 황금빛 들녘이나 선홍빛 단풍은 소원해도 가을은 가을이다. 다만 9월에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계절보다 자연의 변신이 늦다. 아직은 푸른 가을이다. 아쉽게도 어중간한 사이의 달이다. 마음에는 자꾸 헛바람만 일고, 시선은 습관처럼 창밖을 향한다. 9월은 또 그런 달이다. 계절의 초입에 어정쩡하게 서 있지만, 그러므로 떠나고 싶은 사람을 안달 나게 한다.

전북 고창은 기어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고장이다. 이른 가을, 9월을 꽉 채운 자연의 풍광이다. 하물며 수확의 계절이라는 가을의 꽃놀이다. 먼저 선운사의 꽃무릇이다. 선운사는 봄날의 동백과 벚꽃이 곱다. 하지만 가을에는 단연 꽃무릇이다. 단풍에 앞서 가을을 붉게 물들인다. 꽃무릇은 비늘줄기에서 뻗어나온 꽃줄기에 여러 개의 꽃이 방사형으로 달렸다. 붉은 선들이 몽실몽실 하나의 꽃을 이루는 것이 속눈썹을 치켜세운 듯하다. 여린 듯 도도하고 가녀린 듯 탐스럽다. 선운사를 향하는 도솔천부터 그 자태를 뽐낸다. 특히 선운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길이 절정이다. 온통 꽃무릇이다. ‘무릇 꽃이란 꽃무릇이다’라는 농이 실감난다. 올해 선운사 꽃무릇은 9월15일께 개화를 시작해 20일을 지나며 만개할 예정이다. 24~25일은 선운문화제로 열린다.

선운사 인근에는 안현 돋움볕마을과 미당시문학관도 있다. 돋움볕마을은 서정주의 시와 국화로 이뤄진 벽화가 유명하다. ‘내 누이 같이 생긴 꽃’을 닮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얼굴도 벽에 그려졌다. 시월에는 가을 국화도 길 따라 화사하다. 마을을 따라 한적한 산책의 걸음을 내기에 좋다. 미당시문학관도 걸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폐교를 개조해 서정주 시인의 일생을 담았다. 문학관에는 서정시인 서정주와 친일시인 서정주의 작품이 공존한다. 옥상에 오르면 돋움볕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부안면을 벗어나서는 공음면으로 향한다. 메밀꽃을 맞으러 가는 길이다. 고창군 공음면의 학원농장은 청보리밭으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한여름에는 해바라기가 가득하고, 9월에는 메밀꽃의 천국이다. 선운사의 꽃무릇이 낱낱의 송이가 가진 날렵한 선의 매혹으로 눈길을 멎게 한다면, 메밀꽃은 꽃들이 어우러진 거대한 들판의 위용으로 시계를 가득 채운다. 전혀 다른 멋이다. 영화 의 메밀밭 명장면을 찍은 곳도 강원도가 아니라 학원농장이었다. 푸른 보리밭 사잇길이 아닌 하얀 메밀꽃 사이를 걸으며 또 한 번의 꽃잔치를 경험한다. 9월17일∼10월3일에는 메밀꽃축제가 열린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고인돌공원이나 고창읍성도 권한다. 고인돌공원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매산마을 일대에 다양한 양식과 크기의 고인돌이 약 440여 기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이다. 걷기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고창읍성도 좋다. 답성놀이 풍속이 있는데, 성곽 길을 한 바퀴 돌면 아픈 다리가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 승천한다 전한다. 오는 10월1∼5일에는 고창모양성제가 열려 좀더 알차게 누릴 수 있다. 앞서 말한 명소들이 속한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 길’은 도보여행 코스로 좋다. 고창은 풍천장어가 별미인데, 용궁회관(063-562-6464)에서는 갯벌풍천장어를 낸다. 신덕식당(063-562-1533)도 괜찮다. 등록문화재 제325호로 등록된 조양식당(063-508-8381)의 한정식도 일품이다.

박상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