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서울, 문화지도가 넓어진다

도시 변두리와 구도심 등 회색 공간의 흥미로운 진화, 문화예술무대로 재탄생한 서울의 낡고 낯선 공간들
등록 2011-08-26 15:43 수정 2020-05-03 04:26
» 올림픽홀 뮤즈라이브 제공

» 올림픽홀 뮤즈라이브 제공

연극은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밴드 공연은 서울 마포구 홍익대 주변, 클래식 공연이나 뮤지컬은 서울 강남, 미술은 종로구 인사동이나 사간동이다. 문화예술은 장르별로 서울 안의 특정 지역에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만큼 공연장이나 전시장이 몰려 있고, 그 안에서 하나의 판이 만들어진다. 문화예술이 몰려 있는 특정 지역은 주로 도심 한복판이나 사람들의 이동이 활발한 중심지다. 그런데 최근 서울 구도심과 주변부 등지에서 하나둘 흥미로운 움직임이 포착된다. 말하자면 서울의 문화지도가 넓어지는 중이랄까.

서부역에 찾아온 붉은 극장

서울역은 신기한 곳이다. 날씨가 아무리 맑아도 ‘기분 탓인지’ 항상 우중충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랬던 서울역 인근에 문화와 예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역 서부역 방면 소화아동병원 옆에 빨간색 건물이 여러 채 들어섰다. 회색 지도에 실수로 물감을 흘린 것 같은 빨간색은 이 지역에 잔잔하지만 강렬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빨간 건물은 지난해 12월 이곳에 자리잡은 새로운 국립극단의 공연장 건물이다. 국립중앙극장 전속 단체이던 국립극단은 지난해 7월 진통 끝에 법인화를 이뤄내고 홀로 섰다. 독립한 국립극단은 지난해 12월 이곳 서울시 용산구 서계동 1번지에 원로 연극배우 백성희와 장민호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과 소극장 판을 세웠다.

1950년에 창단돼 한국전쟁 등 현대사를 헤쳐온 국립극단은 한국 현대연극의 살아 있는 역사다. 창단되고 서울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건물 부지)에 첫 터를 닦은 국립극단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구 문화극장으로 내려갔다가 1957년 서울로 돌아와 명동 시공관 시대를 맞았다. 이후 명동 국립극장, 남산 국립극장 시대를 지나온 국립극단은 기무사령부 수송대 부지에서 또다시 역사를 써내려가는 중이다.

» 국립극단. 국립극단 제공

» 국립극단.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이 서계동에 자리잡은 것은 도심에 위치하지만 좀처럼 문화시설이 들어서지 못한 지역에 ‘진출’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기무사 수송대 부지, 곧 군 시설 터가 극장으로 바뀌었다는 의미도 있다. 서계동 1번지는 1981년 12월 기무사 수송대 부지로 조성돼 군차고지와 차량정비소로 사용됐다. 그러다가 기무사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자 한동안 빈 공간으로 남아 있던 이 건물은 지난해 5월 국방부가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공간 조성 제의를 받아들여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칙칙한 흰색 벽과 푸른색 지붕은 빨간색으로 칠했다. 차고·정비고·막사가 극장·연습실·사무실 등으로 바뀌었다.

국립극단 손신형 프로듀서는 “처음에는 공연이 이뤄진 적이 없는 이 지역에서 어떻게 공연을 해나갈지 막막했다”고 말했다. “교통이 불편해 관객이 멀게 느끼지 않을까 걱정도 했어요. 지난 3월 개관 공연을 했는데, 관객이 한 번 오고 나서는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느냐며 좋아하더라고요. 이전에 비공개 지역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술가들은 영감을 주는 부분이 있다고 해요. 이곳의 지난 시간으로 공연이나 퍼포먼스, 전시를 하고 싶어하는 작가들도 있어요. 폭력과 억압의 공간이 예술 공간으로 열렸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엔 국립극단 공연장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어요.”

문화공간 카운트다운 들어간 옛 서울역사

문화예술의 바람은 서울역 서부역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불어왔다. 지난 8월11일 사적 제284호인 옛 서울역사에 불이 다시 켜졌다. 2004년 서울역 KTX신역사가 완성된 뒤 철도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지난 7년 동안 원형 복원 공사가 진행된 옛 서울역사가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바꿔달고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려는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 CJ아지트. CJ아지트 제공

» CJ아지트. CJ아지트 제공

1900년 7월5일 한강철교와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세워진 남대문역이 서울역의 시작이었다. 1923년 남대문역에서 경성역으로 바뀐 다음, 1925년 지금의 옛 서울역사인 경성역사가 설립됐다. 식민지 조선의 철도가 일본의 국책회사인 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되고 경영되던 시절에 시공됐고, 준공 이후에는 만주철도주식회사에 위탁된 철도경영권이 조선총독부에 환수됐다. 1947년 경성역에서 서울역으로 바뀌었고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서울역은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2004년 고속철도 시대가 시작되자 옛 서울역사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

식민지배의 중심 공간이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자본주의의 그림자이며, 당시 근대문화의 중심 공간이기도 했던 옛 서울역사는 해방 이후에는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 고단한 이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다.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안고 있는 옛 서울역사는 문화재로서의 가치 복원 필요성이 제기돼 지난 7년 동안 1925년 준공 때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작업이 이뤄졌다. 복원된 옛 서울역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역서울 284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으로 다양한 생활문화의 생산 거점이자 네트워크로 연계되는 문화역이 될 것”이라며 “전시, 공연, 콘퍼런스 등 문화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정식 개관일인 내년 3월까지 6개월 동안 이곳에서는 개관 프로젝트인 ‘카운트다운’이 진행된다. 프로젝트는 전시·공연·영화·강의 등으로 구성된다. 전시는 박찬경, 노재운, 슬기와 민, 안규철, 잭슨홍, 최수환, SASA[44] 등 35명의 작가가 복원된 상태 그대로의 서울역사에 설치·영상·퍼포먼스 등의 작품을 추가하고 채워넣는 방식이다. 브로콜리너마저, 갤럭시익스프레스, 백현진 등 인디뮤지션은 12월까지 격주 토요일마다 1층 RTO 공간을 무대로 공연을 갖는다. 파이프가 노출되고 벽은 마감되지 않은 상태인 이곳에서 펑크·모던록·전자음악 등 다양한 음악이 울려퍼진다. 영화는 9월부터 12월까지 매주 3회에 걸쳐 복원·도시·시간을 주제로 한 20여 편이 상영될 예정이다.

연탄공장터에 울려퍼질 ‘맘마미아’

서울의 서남쪽은 다른 지역보다 문화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역이다. 특히 구로·영등포와 맞닿아 있는 신도림 지역은 이전에는 공장이 밀집됐고, 요즘은 인천과 서울을 잇는 지하철 환승역과 상가, 아파트가 주를 이룬다. 공연장이나 전시장 등과는 제법 거리가 있던 서남부 지역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09년 영등포역 인근에 문을 연 타임스퀘어 내 CGV아트홀에 이어 오는 8월26일 신도림역 바로 옆에 문을 여는 복합쇼핑몰 디큐브시티 7~10층에 디큐브아트센터가 들어선다. 디큐브시티가 자리한 터는 디큐브시티를 운영하는 대성산업의 옛 연탄공장터로 35만㎡(약 10만5천 평)에 달한다.

» 뮤즈라이브. 올림픽홀 뮤즈라이브 제공

» 뮤즈라이브. 올림픽홀 뮤즈라이브 제공

디큐브아트센터에는 디큐브시어터와 스페이스 신도림 등 2개의 공연장이 있다. 뮤지컬과 오페라, 발레 등을 주로 올릴 예정인 디큐브시어터는 1200석 규모의 공연장이다. 500석 규모인 타임스퀘어 CGV아트홀의 2.4배 크기다. 박스형 무대로 설계된 스페이스 신도림은 500석 규모로 콘서트나 연극 등이 주로 열릴 예정이다. 아트센터 쪽은 ‘서남권 최대 규모의 공연장’이라는 데 기대가 크다. 이 지역 주민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지역 문화를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디큐브시어터의 개막작은 뮤지컬 다.

이번엔 서울 동남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홍익대 인근 클럽이나 공연장에서 주로 울려퍼지던 인디음악이 어쩐 일인지 송파구 방이동에서 들려온다. 그동안 테니스장으로 사용해온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이 1여 년의 리모델링 끝에 지난 6월 좌석 2400석과 스탠딩 700석을 갖춘 대중음악 전문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그 옆에 인디밴드 공연이 펼쳐지는 240석 규모의 소극장 뮤즈라이브도 문을 열었다.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도 반갑지만, 그보다 더 반가운 건 뮤즈라이브다. 좀처럼 무대를 찾기 힘든 인디밴드와 중견 뮤지션이 오를 수 있는 무대가 늘어났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반갑다.

뮤즈라이브는 개관 기념 공연으로 7회에 걸쳐 ‘한국 대중음악 라이브홀릭’을 진행했다. 1980∼2000년대 록을 비롯해 포크, 재즈 등에서 활동해온 정상급 아티스트가 2명씩 프로젝트로 팀을 이뤄 연주했다. 한상원과 김종진, 이정선과 엄인호, 말로와 박주원, 옥상달빛과 몽구스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이렇게 상업적인 공연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공연이 이곳에서는 이뤄진다. 개관 기념 공연을 비롯해 올해까지 뮤즈라이브 기획 공연을 총괄하는 가슴네트워크 대표이자 대중음악평론가 박준흠씨는 “정확하게 파악은 힘들지만 송파구 지역에서 인디음악 등 대중음악을 즐기고 싶은 젊은 층이 많이 찾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역 주민들이 좀더 가깝게 대중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상업적인 공연을 하기에는 티켓 파워가 부족한 중견 뮤지션이 설 공연장이 생긴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며 “고품격 대중음악을 선보일 수 있는 공연장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주택가에 스며든 예술가들의 아지트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의 문화지도를 넓히는 공연장도 중요하지만 작지만 지역에서 상징성을 갖고 알차게 운영되는 공연장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서울 명동성당 뒤쪽 언덕길에 위치한 삼일로창고극장이 지난 8월10일 다시 문을 열었다. 1975년 개관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소극장’ ‘국내 최초의 창고극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 극장은 35년이 넘는 시간만큼이나 쉽지 않은 세월을 이어왔다. 폐관과 재개관을 거듭했고 올해도 폐관 위기가 왔지만, 지난 4월 태광그룹의 후원이 결정됨에 따라 4개월간의 수리·보수 끝에 다시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 공연은 뮤지컬 이다.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에서 한강 쪽으로 걷다 보면 마포구 신정동 주택가에 흰색의 네모난 공연장이 눈에 들어온다. CJ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창작공간이자 공연장인 CJ아지트다. 2009년 개관해 순수예술 작품 지원 공간으로 쓰이다가 지난해 대중예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스튜디오형으로 설계된 1층 공간에서는 한 달에 1~2회씩 음악·뮤지컬 공연 등이 열린다. CJ아지트 조수년씨는 “예술가나 관객 모두 처음에는 위치를 낯설어하지만, 이 공간에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를 찾아 꾸준히 찾아온다”며 “작지만 시설이나 음향 면에서도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서울은 1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는 거대한 도시다. 25개 구에는 각각 5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50만 명은 유럽으로 치면 웬만한 도시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다. 50만 명은 지역 내에서 몇 개의 공연이나 전시 등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수이기도 하다. 또 문화예술 공간이 일부 지역에만 몰려 있기에는 서울에 매력적인 지역이 너무 많다. 이번주에는 서울역 인근을 비롯해 서남·동남쪽으로 넓어지는 새로운 문화공간을, 또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까운 문화예술공간을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 문화지도도, 문화를 즐기는 마음도 두 발로 직접 다녀야 넓어진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