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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건은 한 통의 전화에서 비롯됐다. 토요일 오후 소파에 늘어져 있는데 후배 녀석이 전활 했다. 양쥐(별명)였다. 십중팔구 술 먹자는 전화를, 십중팔구 거절하지 못할 성정의 내가 냉큼 받았다. 역시나 녀석은 집사람과 다퉜다며 소주나 한잔하자고 했다. 예로부터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과 와잎의 기분이라고 했던가. 십중팔구 외출을 허락하지 않을 와잎에게 난,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양쥐가 할 얘기 있다고 잠깐 보자는데… 괜(귀)찮아?” 일부러 괜과 귀의 중간 발음으로 말을 흐렸다. 간 보고 안 되면 귀찮아~로 스탠스를 잡으려는 나름의 꼼수였는데. “잘됐네~. 귀찮으니까 가지 마~!” “….” 야, 그게 아니잖아~. 아 다르고 어 다른데 괜과 귀의 차이도 모르냐~. 나도 주말에 숨 좀 쉬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영원히 숨 못 쉬는 수가 있어~라는 예전 대답이 떠올라 꾹 참았다. 남의 부부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 이럴 땐 “설거지나 해야겠다~”는 말로 못 들은 척하는 게 상책.
아비의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아들 녀석은 그날따라 초저녁께 일찍 잠이 들었다. 난 힘겹게 분위기(?)를 잡았다. “여봉~~ 애도 일찍 잤는뎅~~ 나 나갔다 오면 안 될까?” 와잎은 참 애쓴다 애써~라는 표정이었다. “나갔다 와~. 그 대신 일찍 와~!” “물론이쥐~ 베베~.” 내일 아침에 일찍 와주지~ 흐흐. 부랴부랴 뛰어나가 양쥐와 만난 곳은 구반포에 위치한 고깃집 공룡고기. 문학평론가 김현의 단골집이었다는 반포치킨 2층에 자리한 공룡고기는 참숯에 차진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맛집이다. 우삼겹으로 시작해 목살과 항정살을 연거푸 시켜먹었다. 가격 대비 고기의 질이 좋았다. 소주 한 잔 걸치며 고기 한 점 집어 먹으니 주중의 피로가 간데없었다.
와잎 때문에 힘들다며 위로받고 싶어하는 눈치의 양쥐를 보며 나도 있는데 왜 그러냐고 진심의 위로를 건넸다. 그래도 성이 안 차 하는 녀석에게 결국 그날의 일을 얘기해줬다. 재작년 6월 그날도 와잎에게 뻥을 치고 충무로 부근에서 친구들과 술을 처먹었다. 밤 11시가 넘자 와잎의 전화가 빗발쳤다. 지금 안 들어오면 문을 안 열어준다는 얼티메이텀(최후통첩)이었다. 며칠 전 실제로 문을 안 열어줘 찜질방 신세를 졌던 나는 허겁지겁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개찰구를 통과해 플랫홈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는데 지하철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난 계단을 건너뛰며 내려갔다. 몇 계단을 남기지 않고 스텝이 엉켰다. 내 이마는 에스컬레이터의 바닥에 꽂혔다. 아직 플랫폼엔 사람들이 있었다. 완전 개망신에 ×팔린 나머지 서서히 고개를 들었더니 한 행인이 (감동의) 손수건을 건네며 말한다. “어~ 피나요!” 손수건을 이마에 댔다가 떼어보니 피 묻은 바코드가 찍혀나왔다. 눈썹과 눈썹 사이에 4줄의 에스컬레이터 세로줄 홈 자국이 선명했다. 역무원이 뛰어나오고 119 응급차에 실려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머리에 이상은 없다고 의사는 말했다. 소식을 듣고 자던 아이 둘러업고 병원에 달려온 와잎의 첫마디. “꼬라지하고는~.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퉁퉁 부은 이마에 반창고로 응급처치를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난 갑자기 울컥했다. 내 인생은 왜 이 꼬라지인 거야~. 이런 내게 와잎은 말했다. “근데 거기에 바코드 인식기 찍으면 얼마로 나올까?” 난 울다가 말했다. “한 3400원 정도?” 아직도 내 미간엔 바코드가 남아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후배 녀석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이제 알았다며 흐뭇해했다. 와잎들의 뒷담화를 까며 서로를 위무한 그날의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날 난 결국 찜질방 신세를 졌다. 수정방에서 잠들어 구안괘사 걸릴 뻔한 얼굴로 난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 꼬라지로는 더는 못 살아. 전쟁이야! To be continued…. 문의 02-595-8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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