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였다. ‘을밀대’를 가자는 와잎의 말을 듣고, 적잖이 저어했다. 그 머뭇거림은 덜 유명한 업소를 소개한다는 칼럼의 취지에서 흘러나왔다기보다는, 을밀대만 가면 소주를 냉면에 말아드시는 와잎의 음주 대폭발 때문이었다. 이를 어쩐다라고 고민하는 사이, 와잎은 벌써 문밖에서 왜 안 나오냐고 채근하는 저주받은 토요일 오후. 아, 정말 월화수목금금금만 있으면 좋겠다~.
가게 앞에는 기다리는 손님들로 줄이 길게 드리웠다. 차라리 잘됐어. 난 이 줄을 언제 기다리냐며 다른 데로 가자고 꼼수를 뒀다. 후텁지근한 날씨와 장난감은 언제 사냐며 보채는 아들 녀석이 내 우군이었다. 와잎은 “수육 대자를 먹을까 소자를 먹을까, 소자는 너무 작겠지?”라고 답했다. 아주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내는구나. 실낱같은 내 희망이 염리동 주민센터 하늘 뒤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와잎은 뒷방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서 수육 대자, 녹두전 하나, 소주 한 병, 양많이 하나라고 주문하는 기민함을 보여줬다. 아주 래퍼가 따로 없었다. 안 왔으면 혼자라도 왔을 기세구나. 그럼 그냥 안 올 걸 그랬어. 와잎의 신속주문 덕에 안주는 신속배달되었다. 와잎은 테이블에 놓인 무절임과 배추김치, 겨자·고추장 종지를 배열하고 녹두전과 수육과 양많이를 배치했다. 그 모습이 경건했다. 아주 제의를 치르는구나. 희생제의를. ‘폭력과 쌍스러움’이구먼
냉면의 맛은 여전했다. 진한 육수의 맛과 쫄깃한 메밀면의 맛. 일반 냉면보단 심심하고, 을지면옥보단 자극적인 맛. 세 번만 먹으면 중독된다는 묘한 매력의 그 맛. 냉면을 먹으며 와잎은 소주를 물처럼 마셨다. 평소 소주를 즐기지 않지만, 여기만 오면 소주가 막 들어간다나. 그게 여기뿐이니. 참고로 을밀대 냉면은 일반, 고명 없이 나오는 민자, 그리고 1.5배로 나오는 양많이가 있다. 최근 9천원으로 냉면 가격을 인상한 점을 고려하면 무조건 양많이를 먹는 게 남는 장사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와잎의 전화가 울렸다. 반갑게 전화를 받은 와잎은 반색하며 대뜸 오라고 했다. 난 직감적으로 위기의식을 느꼈다. 아니다 다를까 근처에 있던 와잎의 절친 김미(별명)가 남편, 아이와 함께 들른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술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대학 시절을 와잎과 더불어 주사파가 아닌, 주사 형성에 매진했던 신이문동의 ‘알코올 블랙홀’ 김미가 온다니. 저주라는 말이 씨가 되었어. 와잎의 휴대전화를 끊어야겠어.
2009년 여름이었다. 김미네 가족과 우리 가족은 일본 후쿠오카로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다. 후쿠오카 시내에 도착해서 우리 두 가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스시바에서 맥주를 먹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난 이 여행에 다른 일정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순진하기도 하지. 3박4일 동안 우리 두 식구는 마시거나 사거나 단 두 형식의 일정만 소화했다. 문화유적을 둘러본다는 등의 일정은 애초부터 계획에 없었다. 심지어 일정은 새벽까지 계속됐다. 매일 밤 와잎과 김미가 후쿠오카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흡입하며 날밤을 까는 동안, 김미의 남편과 난 각자의 호텔방에서 돌 지난 아들 녀석을 어르며 똥기저귀를 갈아주는 ‘뺑이’를 까야만 했다. 후쿠오카를 마치 동네 앞 편의점으로 여겨 매일 새벽까지 날을 패며 술을 마신 와잎과 김미도 대단했지만, 더 대단한 건 그렇게 먹고도 새벽 4시에 호텔방 앞 자판기에서 캔맥주를 사다 입가심(?)한 내 와잎이었다. 맥주가 무슨 가글이니? 하긴 매번 당하면서도 거기까지 속고 따라가 개고생한 내가 대단한지도.
이윽고 도착한 김미는 와잎과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나와 김미의 남편도 동병상련으로 얼싸안았다. 두 남편을 희생양 삼아 을밀대에서 시작된 그날의 ‘제의’는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애들을 재우고 김미의 남편과 난, 집 앞 복도에서 이런 고통을 겪는 남편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자고 가까스로 서로를 다독였다. 문의 02-717-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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