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고 싶었다. 늘 그렇듯이 불안은 또렷했고, 희망은 흐릿했다. 갈 길을 정했지만,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2003년 겨울, 난 속절없이 바다가 보고 싶었다. 여친이던 지금의 와잎은 이런 나를 보고 인천 을왕리에 가자고 했다. 가서 바람 쐬고 오자고 했다. 그 대신 친구 커플이랑 같이 가자고 했다. 조개구이에 소주를 먹자고 했다. 차편이 없으니 누나 차를 빌려오라고도 했다. 회비는 혹시 모르니 10만원이라고 했다. 원님 덕에 나팔이 아니라 아주 나발을 부는구나. 너나 가라 을왕리.
초보운전에 한참을 헤메다 해 질 녘이 돼서야 도착했다. 여친은 곧장 조개구이집으로 우릴 이끌었다. 니가 삐끼니. 여친은 조개구이 모둠 대자에 소주 3병을 시켰다. 니가 물주니. 바다는 안중에도 없었다. 니가 여친이니. 여친과 거의 비슷한 주량을 보이는 친구의 여친 손양과 술만 마시면 자는 나와 엇비슷한 술버릇의 태권(별명)이도 쿵짝이 잘 맞았다. 너를 보고 있어도 네가 보고 싶다도 아니고, 을왕리에 와서도 난 바다가 보고 싶었다. 4명이 소주 13병에 맥주 5병을 마시고 나서야 조개구이 장갑을 벗었다. 이제야 바다를 볼 수 있겠지. 술 취한 여친은 시간이 늦었으니 숙소를 먼저 잡아야 한다고 했다. 너 왜 왔니 여기. 결국 태권이와 난 주변을 돌며 싼 숙박업소를 물색했다. 뒤따라오던 여친이 갑자기 ‘꺄악∼’ 소릴 질렀다. 뒤돌아보니 길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술 취해 스텝이 엉켜 넘어진 것이었다. 일으켜 세우니 오른쪽 얼굴이 바닥에 쓸려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아주 생쇼를 하는구나. 피를 보고야 말았어. 여친은 엉엉 울며 빨리 약을 사오라고 난리였다. 부랴부랴 약국을 찾았으나 이미 문을 닫은 상태. 숙소를 잡고 주인 아주머니가 건네준 ‘아끼징끼’와 대일밴드를 붙이는 것으로 응급처치를 대신했다. 애꾸눈 하록 선장 같은 몰골을 한 여친은 술기운으로라도 버텨야 한다며 술을 사오라 시켰다. 태권이와 난 근처 슈퍼에서 소주 2병, 맥주 1.6ℓ들이 큐팩 4개와 안줏거리를 산 뒤 큐팩 하나는 따로 챙겼다. 산 술을 진상(?)에게 진상한 뒤, 태권이와 난 둘이서 바닷가로 향했다. 칠흑 같은 밤, 서해 바다의 탁한 바닷물은 보이지 않았다. 파도야, 내 슬픔을 너는 아느냐, 바다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파도 소리를 안주 삼아 우리는 술을 마셨다. 어깨동무를 한 채 김현식과 푸른 하늘의 도 부르고 낭만자객이 따로 없었다.
지난 주말, 족발을 뜯으며 그 태권이 커플과 함께 그날을 떠올렸다. 와잎은 술맛 떨어진다며 그만 얘기하라 했다. 그럼 더 해야겠군. 8년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까닭에 시멘트 바닥에 얼굴 스크래치할 일만 없어진 것 빼고. 회사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정가네 숯불 왕족발’은 쫄깃하고 부드러운 육질의 족발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는 서울 봉천동의 숨겨진 맛집이다. 개인적으로 종로구 창신동에 위치한 ‘와글와글 족발’과 자웅을 겨룰 만한 집이라고 생각한다. 족발은 숯불과 양념숯불 두 가지가 있는데, 족발 본연의 맛을 원한다면 숯불로 강추! 먹다 보면 막국수가 서비스로 나온다. 족발 한 점을 집어 막국수와 함께 먹는 기막힌 맛은, 고단한 결혼 생활에 더없는 위로라고 생각한 순간, 제명을 시키고 싶었다. “소맥 추가!”를 외치는 와잎을.
족발을 먹어서였을까. 그날 새벽 와잎은 화장실에서 실족을 했다. 술만 마시면 넘어지니. 술 마시고 걸음마를 배웠니. 팔꿈치에 파스를 붙여주며, 난 주인 잘못 만나 만신창이가 된 와잎의 몸뚱아리를 애도했다. 문의 02-877-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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