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 이대로 집에 가버려? 누군가와 새로 술잔을 섞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불 꺼진 방에 혼자 틀어박히기엔 서울의 밤이 너무 밝다. 일본 만화작가 아베 야로의 은 도쿄 신주쿠의 어느 뒷골목에 있을 법한 작은 밥집이다.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문을 열어놓으면 한물간 배우, 스트리퍼 걸, 만담가, 야쿠자, 직장인들이 주정과 고백을 한데 부려놓고 가는 곳이다. 만화의 인기에 업혀서 한국에도 같은 이름의 라디오 프로그램, 책, 노래까지 등장했다. 차수를 거듭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과 뱃속을 달래줄 만한 곳, 서울에는 없을까? 집 앞 골목에서 새버리기 좋은 식당들을 소개한다._편집자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서울의 홍익대 주변에도 이태원에도 단골집 있는 여자다. 그런데 여의도라는 섬 아닌 섬에 발을 들인 뒤부터, 어째서인지 이곳에 발이 묶여버렸다. 여기엔 정 붙이고 밤새워 마실 수 있는 집도 없는데 말이다. 정 붙일 수 없는 것은 편하고 맛깔 나는 집이 없기 때문이고, 밤새워 마실 수 없는 것은 이곳 술집들이 일찍 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게 싫어서 늘 여의도 밖을 꿈꾸는데 이상하게 잘 안 된다. “홍대 가자!”로 시작된 발걸음은 어영부영하는 사이 어느덧 공작상가 한 구석 허름한 호프집으로 향한다. 김유신 장군의 말이라도 된 건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이곳에도 단골집은 있다. 내가 처음 신고식을 치른 장소는 이름하야 ‘장미의 집’. 1980년대 소설 제목 같은 이 술집은 뜻밖에도 돼지 불고깃집인데 (허걱!) 2층 계단을 올라가 이 집 문을 열면 튼실한 나무 테이블이 3열 종대로 쫙 늘어서 있고, 그 위에는 가스버너가 예쁘게 정렬해 있어서 금세 압도당하고 만다. 왠지 군대 식당 같은 이 집에서 대부분의 환영회가 치러지기 때문에, 신입 PD들은 누구라도 께름칙한 기억 하나씩은 안고 간다. 고백하건대, 나도 그날 화장실에서 엄청 토했다.
다음으로 선배들 손에 이끌려 자주 가게 된 곳은 ‘서궁’이라는 중국집이다. 인기 메뉴는 오향장육과 만두인데, 여의도 맛집 중 하나인 만큼 맛이 기막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집은 일찍 닫는다. 그래서 선배들은 여기만 오면 “빨리 먹고 빨리 취해야 한다”며 꼭 고량주를 시킨다. 나는 ‘연태고량주’니 ‘공부가주’니 하는 수많은 고량주의 이름을 이 집에서 다 배웠다. 문제는 2차다. 고량주로 1차 하고 ‘소폭’ 마시러 간 날, 나는 한 선배의 손을 부여잡고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다음날 아침 그 선배도 나도 숙취해소 음료를 사 먹어야 했다.
한 군데 더 소개한다면 단연 ‘농닭’이다. 파닭도 아니고 농닭…. 정말 알 수 없는 이름인데 줄임말이다. 본래 이름은 ‘농부와 닭동네’. 헐…, 왠지 장미십자기사단의 비밀결사대 같은 이름 아닌가. 전에 한 선배의 트위터에서 “농닭에서 만나자” “농닭에서 치떡 먹어요”라는 암호 같은 대화가 오가자, 어느 폴로어가 “유명한 여의도 맛집인가봐요?” 하고 물어서 다들 빵 터졌다. 물론 이 집 치킨과 번데기탕이 맛있기는 하다. 하지만 새벽 2시만 되면 주인 아주머니가 우리 중생들을 칼같이 내치는 고로, 안식을 찾기에는 무뚝뚝한 집이다.
라디오 PD들의 술자리는 언제나 릴레이 마라톤이다. 저녁 6시 퇴근자들이 모여 두어 시간 마시고 있으면 ‘세계는’과 ‘음캠’ 팀이 온다. 다시 2시간이 지나면 ‘친친’ PD가, 또 2시간이 지나면 ‘별밤’ ‘꿈꾸라’ 팀이 온다. 마지막으로 ‘심타’와 ‘푸른밤’ 팀이 도착하는데 이미 시각은 새벽 2시. 선발대가 이미 8시간이나 술을 퍼마신 뒤에야 겨우 대오가 갖춰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쫓겨난다. ‘서궁’이 문 닫으면 ‘농닭’으로, 거기서 쫓겨나면 ‘동해 골뱅이’로, 거기도 닫으면 ‘곰돌이’로. 엑소더스에 엑소더스가 거듭된다. ‘공장’(회사) 얘기하지 말자고 시작한 술자리는 어느새 공장 얘기로 돌아와 있고, 여의도 탈출을 꿈꾸었던 우리는 어느덧 문화방송 건너편 포차로 돌아와 동 틀 녘 출근하는 ‘시선집중’ 팀을 본다.
언제나 탈출을 꿈꾸지만 결국 같은 자리에 와 있는 것. 다람쥐 쳇바퀴 같은 긴긴 밤의 대질주가 우리 라디오 PD들의 심야식당인지 모른다.
김나형 문화방송 라디오 PD
‘거리의 셰프’ 활동 무대는 서울 건대역 광진문화예술회관 옆쪽 주택가와 맞닿은 골목이다. 퇴근길 회사원도, 근처 건물에서 일하는 50대 중년 아저씨도, 밤새워 포장마차 의자에 진을 치는 학생들도 채낙영(27)씨를 “셰프”라 부른다. 그는 매일 밤 9시30분 트럭에서 가스버너와 물통, 와인과 고추장, 파스타와 카레 봉지 같은 국적 불명의 요리 재료들을 꺼내든다. 조리학과를 나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요리사 수업을 받던 그가 뉴 코리안 제육 푸실리 파스타나, 겉절이 샐러드, 커리 크림 파스타 같은 ‘듣보잡’ 요리를 만든다. 낮에 찾아다닌 명성 드높은 레스토랑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포장마차식으로 변용했단다. 좌판에서 파스타와 와인을 찾는 발길은 새벽 3시까지 이어진다.
술자리가 3차까지 이어졌을 때 시키는 안주는 보통 국물 안주다. 알코올로 헌 속도 달랠 겸, 달랜 속으로 마지막 스퍼트도 올릴 겸 따끈하면서 부담스럽지 않은 건더기를 올린 국물 요리에 ‘한 병 더’를 덧붙인다.
구운 연어와 매실, 얇게 썬 생강 등을 올린 오차즈케 사발을 사이에 두고 두 여자는 말이 없다. 그녀들은 중요한 소개팅에 나선 여자들처럼 근사하게 차려입었다. 핸드백엔 구치와 디오르 로고가 다닥다닥 박혀 있고 ‘고심하며 만든 티가 나지 않는 고심해서 만든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우리 못 만난 그간 난 멋지게 잘 지냈단다, 식의 오라를 우아하게 뿜어내려는 결의가 엿보인다. ‘우리 그때’로 시작되는 대화가 잦은 것으로 보아 오랜만에 만난 듯 보인다. 두 여자는 꽤 취해 있으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얼굴들이다. 1차에선 과거 지겨울 정도로 어울리던 시절을 회상하며 순식간에 정을 붙였을 테고, 그 정을 배터리 삼아 2차까지 냅다 달렸을 것이다. 헤어지기엔 왠지 아쉽고 헤어지기 전 이 관계가 다시 단단해졌다는 증표를 얻고 싶어 무리해 3차의 문을 열어젖혔지만, 막상 새벽 3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자 피곤도 몰려오고 다시 멀어졌던 관계의 어색함과 냉소를 느끼는, 그런 얼굴들이다. 추억팔이의 끝이 보인다.
건너편 테이블에선 거하게 취한 네 명의 남자가 걸진 목소리로 이 자리에 없는 ‘그 새끼’를 욕하고 있다. ‘그 새끼’는 그들보다 잘 벌고 그들보다 좋은 차를 끌지만, 그들 기준에선 그럴 자격이 없는 놈이다. ‘환자’와 ‘필러’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일 것이다. 아마도 피부과리라. 가장 술꽃이 만개한 남자가 내일 아침 9시에 시술이 잡혀 있다며 미용을 위해 아침잠을 희생하는 여자의 바지런함을 조소한다. 옆자리 남자가 저번주 술이 덜 깬 채 필러를 시술했던 여자가 너무 예쁘게 됐다며 감사 문자를 보낸 에피소드를 낄낄거리며 풀어놓는다. 각자 넥타이는 왼쪽 주머니나 두 번째, 세 번째 단추 사이에 끼워넣었고 얼굴들은 사우나에서 방금 나온 사람들처럼 벌겋다. 그러나 이만 정리하자는 남자는 아무도 없다.
“여기 꼬치 모둠으로!”
남자 하나가 걸진 목소리로 주문을 한다. 느슨하게 풀린 벨트가 모든 것을 포용하리라 믿으며. 주방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들린다. 두 여자는 말없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주방을 응시한다. ‘이 시간까지 같이 있는 건 오버였어. 할 말이 없으니 사이도 다시 어정쩡해지는 것 같아.’ 무표정 속에 초조함이 읽힌다. 한 여자가 루이뷔통 스카프를 두르자 나머지 여자가 백에서 샤넬 립스틱을 꺼내 바른다. 이제 갈 때가 되었다는 여자들만의 제스처다.
곧 종업원이 모셔온 꼬치 모둠이 남자들의 테이블을 위엄 있게 지배한다. 한두 명만 젓가락을 성의 없이 놀릴 뿐, 나머지는 소주잔을 비우기에 여념이 없다. 새 안주는 금세 위엄을 잃었다.
주사 잡을 때 손 떨릴라!
새 안주가 나온 지 10분도 되지 않아 남자들이 일어선다. 누구도 남은 안주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히자 두 여자가 고개를 돌려 빈 테이블에 민망하게 놓인 커다란 그릇을 응시한다. 아스파라거스와 팽이버섯만 조금 갉아 먹혔을 뿐, 나머지는 말짱하다. 두 여자가 시선을 마주친다. 여고생의 식탐이 그녀들의 이성을 뒤덮는다.
“저기요, 저거 먹어도 되나요?”
루이뷔통 스카프를 걸친 여자가 킬킬대며 종업원에게 묻는다. 종업원은 의외로 당황하지 않고 “예” 하고 답한다. 아마 말짱하게 남긴 안주를 훔쳐가는 손님이 꽤 되는 모양이다. 두 여자는 귀여운 환호성을 내지르며 꼬치들을 환영한다. 그녀들은 스카프를 도로 풀고 방금 바른 립스틱을 잊고 본격적으로 꼬치를 뜯어대기 시작한다. “웬일이니, 우리.” 한 여자가 입을 우물거린다. “나 너 이래서 완전 좋아.” 나머지 여자가 즐겁게 덧붙였다.
김민서 소설 작가
7명만 되어도 손님을 더 이상 받지 않는다. 일행 중에 여자가 1명이라도 있어야 들어올 수 있다. 남자들만 있으면 꼭 술 마시다 큰 싸움이 나기 때문이란다. 문턱 높은 이곳은 막상 들어가면 번거로울 일이 없다. 그날그날 주인이 시장을 봐서 3~4가지 안주를 내는데 우동, 손만두, 퐁뒤, 생굴, 샐러드 등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 한다. 어떻게 먹든 1인당 1만원씩 안줏값을 내면 그만이다. 청하는 대로 안주를 계속 만들며 배가 찰 때까지 푸짐하게 먹이는 주인이나 알아서 술을 가져다 마시는 단골이나 영락없이 자취방에 놀러온 분위기다. 술 좋아하고 여행 좋아하고 이야기 좋아하는 주인의 취향과, 음악 좋아하고 강남 물가 싫어하는 손님의 취향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태원은 점점 더 베를린 같아지고 있다. 이곳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양한 문화가 한데 끓는 용광로이기 때문이다. 멸균실 같은 청담동에 비해 성전의 위용을 자랑하는 리움미술관과 키치적 대안공간 ‘꿀’, 유기농 브런치 카페와 게이 클럽이 공존하는 이태원은 얼마나 역동적인가. 멋쟁이 패션계 종사자와 기민한 신흥 부동산업자, 부자와 예술가와 외국인이 한데 뒤엉킨 이태원의 매력은 바로 ‘지금은 개조 중’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문물과 전통적인 것이 공존하고, 과거와 현대가 부딪히는 크로스오버 동네, 이태원의 심야식당도 그렇다.
밤 12시가 넘으면 이태원 아우디 매장 옆 ‘나리식당’에는 대패 삼겹살과 묵은지가 기름 냄새를 풍기며 지글지글 익어간다. 클럽 LUV와 B1에서 한창 놀다 나온 땀 젖은 클러버, 가로수길에서 이태원으로 터전을 옮긴 뒤 아틀리에를 재건축 중인 젊은 디자이너, 자신의 작품을 인쇄한 팝아트 문양의 원피스로 차려입은 화가, 사진가와 건축가가 하나둘 나리식당으로 몰려와 기름진 고기를 굽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곳엔 어디에도 구속되고 싶지 않은 이태원 예술가들의 환상과 욕망이 다 있다. 다정한 육식 카니발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처럼 ‘한밤의 고기파티’를 연다. 양은냄비로 끓인 청국장이 테이블에 부록처럼 올라 있다.
이태원의 터줏대감 격인 나리식당에서 대패 삼겹살이 무쇠 철판에 지글지글 익어갈 즈음 또 하나의 낭만적인 심야식당 ‘미뇽’의 주방에선 셰프가 품위 있게 학대당한 거위의 간을 조리하고 있다. 해밀턴호텔 뒤쪽 언덕 돌계단 꼭대기에 위치한 미뇽의 테라스는 밤이 깊어갈수록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미뇽의 여주인은 인심 좋게 젊은 연예인과 강남의 패션피플, 댄디한 게이들에게 황도 복숭아가 곁들여진 돈가스만 한 푸아그라를 내놓는다.
이태원의 심야식당은 금기가 사라진 공간이다. 가끔은 턱시도로 성장을 한 게이가 커다란 인형을 안고 홀 안을 돌아다니며 ‘입양 쇼’를 벌이기도 하고, 새벽녘이면 별빛의 여흥에 취한 여배우가 손님들에게 동페리뇽을 한턱 쏘기도 한다. 미뇽에서 배우를 인터뷰할 때면 새벽녘에 이르러서는 꼭 비밀스러운 러브 스토리를 듣게 된다. 다음날 아침 “오프더레코드였던 거 아시죠?”라고 할 게 분명하지만. 언젠가는 분위기가 절정에 올라 여주인도 문을 닫고 우리끼리 한밤의 댄스파티를 열었다. 여배우가 전화로 부른 당대의 최고 배우들이 기분 좋게 취해 하나둘 미뇽으로 나타났었지. 이곳은 서울 안의 외국, 가장 짧은 시간에 도착한 여행지, 시간의 자오선을 지나 불시착한 국경지대 심야 휴게소처럼 해방감과 흥분감이 안개처럼 퍼져간다.
때로는 유명 영화감독, 사진작가, 화가와 연예인이 골목에 숨겨진 허름한 동네 맛집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으로 마주칠 수 있는 친밀한 야생지. 그래서 밤이 깊어갈수록 고급 식도락에 지루해진 강남 사람들도, 호기심이 동한 강북 샐러리맨들도 구경거리를 찾아 이곳으로 몰려든다. 소방서 맞은편 빌딩 옥상 ‘마이엑스’에서 치킨과 샹그릴라를 마실 때의 다정한 희귀함, 제일기획 앞 일식집 ‘천상’에서 사케 속을 헤엄치는 투명한 활어회를 삼킬 때의 명료한 즐거움, 잘나가는 ‘비트윈’에서 입가심으로 새벽 샴페인을 마시다가도 아쉬움을 어쩌지 못해 마지막으로 ‘이모네’ 감자탕에서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 같은 뼈다귀를 탐한 뒤에야 굿모닝을 겸한 굿바이를 하게 되는. 오늘도 내일도 늘 새로운 일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으로 출렁거리는 이태원의 심야식당.
김지수 피처디렉터
처음 찾아가는 사람들은 골탕 좀 먹으리. 어찌하다 서울 옥인동 아파트 쪽 올라가는 골목길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작은 불빛과 음악만으로 여기가 그곳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단서는 가게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만 한 ‘누하동 우동초밥’이라는 쪽지다. 10명만 넘어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무릎과 어깨를 맞대야 하는 8평 식당은 만화 처럼 비엔나소시지나 바나나튀김 같은 간단한 일품요리 일색이다. 두툼한 생선회나 초밥도 값은 소박하고 맛은 제법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미국 뉴욕에서 초밥 요리사로 일하다 “손님과 말도 하고 술도 나누고 재미있게 살겠다”고 누하동에 터를 잡은 주인장은 저녁 7시에 문을 열어 마지막 손님이 갈 때까지 문을 닫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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