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반가워 죽겠다. 절절 끓는 불가마 찜질방에 들어가도 남들보다 한 템포 늦게 땀이 쏟아질 정도로 몸이 찬 인간인 나로선 특히나 더. 그러나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 겨울에 먹어야 제맛인 음식을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콩비지를 잔뜩 넣고 끓인 김치찌개나 기름 바르지 않고 구워도 한쪽 면이 탐스럽게 반질거리는 질 좋은 돌김, 폭폭 삶은 홍합탕 같은 것.
한창훈의 소설 (한겨레출판 펴냄)은 어촌 마을의 홍합공장이 배경이다. 거문도가 고향인 소설가가 1980년대 후반 여러 해 홍합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쓴 소설이다. 소설에는 잘 삶긴 홍합을 맛있게 먹는 모습 따위를 묘사한 부분은 별로 없다. 바닷바람같이 까끌까끌한 남자들의 입담과 토착성 강한 언어들이 소설 전체를 휘감는다. 그럼에도 소설의 매 장에는 잘 삶긴 홍합 같은 보드랍고 따뜻한 내음이 통째 담겨 있는 듯하다.
“홍합 삶은 물 남었습니까? 아까 기름을 실었등만 영 안 지네요.”/ “솥에 있어. 막 버릴려든 참이여.”/ 문기사는 솥에서 노란 물을 한 바가지 퍼내 트럭 짐칸에 골고루 뿌리고 씻었다. 천연색 기름때가 뜨거운 홍합 국물을 만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7~8쪽)
“바닷물에 홍합을 씻으면 때와 잡물이 깨끗하게 씻겨 반지르르 윤이 났다. 죽어서도 저 살던 곳이 좋은 건지 해물(海物)은 바닷물에 씻어야 꼭 윤기가 났고 민물에 씻으면 탱탱한 맛이 금방 죽어버렸다.”(46쪽)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합 국물을 뒤집어쓴 자동차는 이제 기름 냄새 대신 바다 내음을 흩뿌리며 길을 달릴 것이다. 혹은 바닷가 마을을 달리는 이 자동차는 제 몸도 해물인 양 바닷물을 끼얹어줘야만 기름때 벗긴 반질반질 말간 얼굴을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자식들의 식성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당신 입맛에 좋은 것만 식탁에 올렸던 엄마는 대부분의 조개를 싫어함에도 홍합만은 자주 끓여냈다. 홍합은 우리에게 ‘좌식’ 음식이었다. 질릴 만큼 많은 양을 삶아 꼭 솥째 바닥에 내려놓고 둘러앉아 먹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으나 엄마는 홍합을 먹을 때마다 이보다 쉬운 간식이 없다는 식의 말을 했는데, 자라서 내가 부엌에 자주 서다 보니 알겠다. 날로 먹는 것이 아닌 이상 홍합만큼 싸고 조리가 간단한 해산물은 정말로 흔치 않다.
홍합은 맛이 좋은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조리된다. 벨기에식 홍합찜은 버터와 잘게 썬 양파와 샐러리(없다면 파), 화이트 와인을 넣고 쪄낸다. 서울 서대문구의 유명한 중국 음식점 ‘완차이’는 매운 홍합으로 유명하다. 양식당에 가면 종종 커다란 뉴질랜드산 홍합에 잘게 썬 채소와 치즈 따위를 올려 구워낸 요리도 내준다.
엄마의 무책임한 간식 조리법을 뛰어넘어보려고 레시피를 뒤져 세 가지 다 도전해봤다. 매운 홍합은 가족들한테 무슨 요리냐는 말을 들었고, 홍합치즈구이는 과정만 번잡스러웠다. 마지막으로 지난번 집들이 때 도전한 벨기에식 홍합찜은 그날 차린 요리 중 가장 많이 남은 음식이었다. 나의 부족한 솜씨 탓도 있겠으나 도도한 홍합은 자체로서 가장 좋은 맛을 낸다. 굳이 가미를 하겠다면 청양고추 한두 개만 썰어넣는 정도? 소금간도 하지 않는다. 물을 적게 잡아도 뚜껑을 열어보면 거짓말처럼 진한 국물이 뽀얗게 찰랑인다. 다음 겨울에나 부엌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이겠지. 늦겨울에서 초봄 사이가 제철인 홍합은 늦봄에는 맛이 떨어지고 여름에는 삭시토닌이란 독소를 가져 언어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한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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