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난하다. 가난의 범주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포함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로 포괄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재 한국은 다종다양하게 가난을 앓고 있다. 실업의 경험은 필요치 않아도 공유되며 “내가 대학 졸업하고 몇 달 놀 때…”는 하나의 관용구가 되었다. 23개월째 전세 가격이 고공 상승하는 이 땅에서 ‘나의 집’을 꿈꾼다는 건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은 최근의 저작 (개마고원 펴냄)에서 더 절망적인 문장을 던진다. “우리는 빈곤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역사 이래로 가난과 싸우겠다고 말하지 않은 왕조는 없었다.(중략) 사회주의도 빈곤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힘들게 만들어낸 정치 시스템이지만, 결국에는 그것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게 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빈곤을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하는 정규직
‘디버블링’은 토건 경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실물경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거품이 붕괴하는 현상을 말한다. 거품이 서서히 꺼진다면 모르겠지만 빠르게 진행될 경우 통제하기가 어렵다. 가까운 예로 일본을 보았다. 그러나 정부는 불행 그 자체를 배워오기로 했는지, ‘잘살게 된’ 한국에서 이상하게도 우리는 빈곤의 그림자에 자주 부딪친다. 현 정부가 땅을 파헤치며 투기를 일삼느라 교육이나 문화, 복지 등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에 인색하게 구는 탓이다.
우 소장은 이렇게 형성된 가난에 4개의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1단계 워킹 푸어, 2단계 하우스 푸어, 3단계 크레디트 푸어, 4단계 헬스 푸어. 청년들에게 특정해서 나타났던 빈곤이 이제는 자신이 중산층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니, 한국에선 일을 해도 가난한 워킹 푸어와 집을 가져도 가난한 하우스 푸어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다음 단계인 크레디트 푸어는 미흡한 복지로 인해 발생하는, 가난으로 은행 거래를 제대로 하기 어렵거나 생활자금을 대출받을 수 없게 되는 상태고, 마지막 헬스푸어는 의료보험료를 낼 수 없거나 병원에 갈 수 없는 처지에 이르는 단계다.
가난은 현재에 머물지 않는다. 미래도 집어삼킨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생명의 재생산(임신과 출산)에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낮은 출산율은 사람이 아닌 것들의 생산 또한 멈추게 할 것이다. 잉태조차 하지 못하는 가난은 그렇게 또 다른 가난을 낳는다. 스스로를 복제하며 몸을 불리는 가난과 ‘생산적인 것’의 재생산 멈춤은 종국에 국가를 빈곤의 블랙홀에 빠트릴지 모른다.
그러나 가난의 연쇄에 두 무릎을 꿇기에는 가능성의 틈새들이 보인다. 우 소장은 “삶의 구조 속에서 탈락자의 수를 줄이려 노력하다 보면 빈곤의 폐해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일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선적으로 청년세대의 고용문제 해결을 꼽는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 정부는 스웨덴이나 네덜란드 모델을 따라 노동 유연성을 높이더라도 교육·훈련을 통해 노동자를 새로운 노동 과정에 투입하면 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현실은, 스웨덴이나 네덜란드에서는 가능한 일이 한국에서는 좇을 수 없는 이상일 뿐이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단순한 논리는 차별의 벽을 여전히 넘지 못한다.
우 소장은 “더 많은 월급을 줄 테니 살아남은 당신은 구조조정에 찬성하라”는 신자유주의의 구호, 그리고 살아남은 소수자는 ‘능력자’라는 착각에서 그만 벗어나자고 말한다. 대신에 고용 안정성을 높이고 총임금을 양보하자는 합의안을 제시한다. 종신고용을 전면화하고 개인당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만큼 노동임금을 삭감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일주일에 이틀 일하고 그 대신 절반의 임금만 받자는 것. 그렇게라도 고용은 보장된다면 구미가 당기지 않느냐고 독자에게 묻는다. ‘더 이상 월급을 어떻게 덜 받는단 말인가?’라는 목소리에는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집값, 교육비, 육아 비용 등이 임금이 삭감된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줄면 된다.”
인간의 회복이 경제를 숨쉬게 한다
가능할까? 우 소장은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정규직’이 미래의 경제 고도화를 이끌어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의가 강조되는 이른바 ‘21세기 신사업’ 분야에서는 주 5~6일을 죽어라 일하는 이보다 여유 시간에 더 많이 독서하고 사색하는 이들의 종합적 사고력이 앞서리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잃은 사랑을 할 시간을 되찾고 여유 시간은 잉태와 양육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생태적 문제와도 연결된다.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직장 혹은 재택근무는 환경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논리를 따라가면 이렇다. 시내 주택 가격이 올라가니 사람들은 외곽으로 나가 살게 된다. 잠만 자는 ‘베드타운’이다. 출퇴근에 따른 교통량이 늘고 차가 많아지니 도로도 광역화·대형화됐다. 온실가스 배출이 느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또 다른 제안은 완전연봉제다. 1년치 연봉을 몰아서 주자는 거다. 예컨대 12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가 있다면 12명의 직원에게 다달이 돌아가며 연봉을 주자는 것이다. 회사는 12명에게 12번의 입금을 할 필요가 없어지니 오히려 관리가 수월할 것이다. 노동자에게도 많이 유리할 것이다. 이자소득이 늘고 구매도 계획적으로 할 것이라 기대한다. 이는 일주일 중 이틀 노동으로 총연봉이 줄어도 생활수준은 높아질 것이라는 주장과도 맞닿는다. 사교육 폐지, 주4일제 수업 도입, 등록금 100만원, 주거 보조, 공간의 재구성, 무료 버스 운행, 정부체계 개편 등의 주장도 재기발랄한 논리로 이어진다.
우 소장은 빈곤의 긴 터널을 빠져나갈 여러 낙관적 제안을 했지만, 사실 현실이 쉬이 회복되기 어려우리라는 비관 또한 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쌓는 식의 거품 경제가 아니라 ‘연대’와 ‘상호의존’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민중’이 역사 속으로 다시 복귀하는 시절이 오길 꿈꾼다. 그의 꿈은 이뤄질까? 그는 우리가 ‘명랑’이라는 가치를 잊지 않고 보듬고 달래고 응원하는 방법을 다시 깨닫는다면, 괴물 같았던 우리가 다시 인간이 된다면, 그래서 경쟁과 번영이 아닌 잊었던 ‘문화’와 ‘창의성’ 같은 단어들의 진짜 의미가 회복된다면, 한국 경제도 생태적 전환이 이뤄져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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