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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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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명 중 1명’으로 돌아가는 ‘60억분의 1’ 사나이

지구상 최강의 격투기 선수 표도르의 패배와 은퇴와 번복…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에 한없이 겸손했던 전설의 추억
등록 2011-02-24 17:32 수정 2020-05-03 04:26
표도르 에멜리아넨코. 연합

표도르 에멜리아넨코. 연합

‘60억분의 1’로 불린 인류 최강의 사나이가 무너졌다. 2월13일 미국의 종합격투기 스트라이크포스 무대에서 표도르 에멜리아넨코가 안토니우 시우바에게 무릎을 꿇었다. 지난해 6월 파브리시우 베우둠에게 당한 패배에 이어 두 번째 겪는 패배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격투 스포츠 무대에서 지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표도르였다. 그의 패배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여기에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마저 나왔다. 표도르는 며칠 뒤 곧바로 이를 번복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제 서서히 ‘전설의 퇴장’을 준비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게 됐다.
표도르의 패배와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 직후 국내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표도르’ 혹은 ‘표도르 은퇴’가 갑작스레 떠올랐다. 등 이종격투기 전문 사이트는 방문자 폭주로 서버가 마비될 정도였다. 박찬호도 아니고 박지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김연아나 박태환도 아닌, 그저 푸른 눈의 러시아 출신 격투기 선수의 패배와 은퇴 선언에 우리가 함께 마음 아파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_편집자

2005년 8월28일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세기의 대결을 기억한다. 그때 종합격투기의 인기란 정말 대단했다. 서울 시내 곳곳에 ‘불꽃 하이킥 크로캅 vs 얼음주먹 표도르 경기 생중계’라고 쓰인 안내판을 붙여놓고 손님을 끄는 술집이 등장했고, 그런 곳마다 여지없이 만원을 이뤘다. 심지어 서울 명동의 중앙시네마(지난해 5월 폐관)에서는 영화 대신 두 사람의 경기를 상영할 정도였다.

사실 이날 미르코 크로캅과 프라이드FC 헤비급 타이틀매치를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표도르 에멜리아넨코의 인기가 지금처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종합격투기의 주무대 일본에서는 챔피언 표도르보다 크로캅을 더 높이 쳐줬다. 깔끔한 외모와 탄탄한 근육을 지닌 크로캅은 타격기 위주의 선수였고 일격필살의 하이킥이 주무기였다.

표도르는 외모부터 크로캅과 딴판이었다. M자형으로 벗겨진 머리에 날카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글동글한 얼굴, 근육 대신 말랑말랑한 살로 꽉 찬 상체를 보면 그는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였다. 호랑이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미들킥으로 상대의 가드를 내린 뒤 하이킥 한 방으로 경기를 끝내는 크로캅과 달리, 표도르는 유도와 러시아 삼보 기술을 이용해 일단 상대를 바닥에 눕혀놓고 때리는 유형의 선수였다.

2월13일 ‘격투기의 전설’이 무너졌다. 표도르 에멜리아넨코는 안토니우 시우바를 맞아 고전 끝에 패했다.AP 연합

2월13일 ‘격투기의 전설’이 무너졌다. 표도르 에멜리아넨코는 안토니우 시우바를 맞아 고전 끝에 패했다.AP 연합

예상을 뒤집은 크로캅과의 대결

2004년 그가 안토니우 호드리구 노게이라를 꺾고 프라이드FC 챔피언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경기 출전 수당도 크로캅에 미치지 못했다. 서서 때리는 입식타격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합격투기에 익숙하지 못했던 국내 격투기 팬의 점수도 그랬다. ‘빤쓰’만 입은 남자 두 명이 링 바닥에서 부둥켜안거나 상대를 품에 안은 채 토닥이는 모습보다 깔끔하게 한 방으로 끝내는 선수를 선호했다. 크로캅이 바로 그런 선수였다.

세기의 대결은 표도르의 승리로 끝났다. 크로캅은 역시나 맹수처럼 표도르 주위를 돌며 한 방의 기회를 엿봤고, 표도르는 그를 붙잡아 넘어뜨렸고 마구 때렸다. 그때만 해도 표도르의 승리보다 크로캅의 패배에 관심을 쏟은 사람이 많았다. 나 또한 크로캅의 패배를 애써 불운 탓으로 돌렸다.

표도르를 진정한 ‘60억분의 1’ 사나이로 인정한 건 그 이후였다. 2005년 12월31일 언론에서 ‘마신’ ‘브라질산 악마’라고 떠들던 몸무게 184kg의 줄루지뉴를 경기 시작 26초 만에 정신없이 때려 실신시킨 장면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183cm의 키에 몸무게 100kg 남짓한 표도르는 헤비급 선수치고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최홍만과 팀 실비아 등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상대를 맞아 번번이 승리를 거뒀다.

격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표도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등에서는 ‘김두한과 표도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표도르가 조폭 10명과 동시에 싸워 이길 수 있을까’ ‘표도르가 맨손으로 호랑이와 싸운다면’을 놓고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표도르의 강함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종합격투기에 입문하기 전 유도와 러시아 삼보를 익힌 표도르는 상대방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무게중심을 흔들어 쓰러뜨리거나 빠져나올 줄 알았다. 그라운드에 등을 대고 누운 자세에서 상대방의 펀치를 맞아가면서도 빈틈을 노려 팔을 꺾었고, 눈앞으로 주먹이 날아오면 더 빠르게 맞받아쳤다.

무엇보다 상대방을 압도한 건 숨 막히게 차가운 그의 눈빛이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고 빠르게 나오는 그의 펀치와 무표정하게 상대를 응시하는 표도르의 시선은 절권도를 창안한 이소룡을 닮았다. 영화에서 이소룡은 날아차기 등 북파 소림권에서 유래한 화려한 동작을 주로 선보였지만 실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처럼 야성적인 ‘괴조음’을 내지도 않았고,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한 ‘싱하형’처럼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리지도 않았으며, 쓸데없이 화려한 동작을 즐기지도 않았다.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최대한 단순하고 간결하고 빠르게 타격했다. 이런 매서운 시선을 이소룡은 ‘통제된 잔학함’이라고 표현했다.

2006년 1월 서울을 찾아 개고기를 먹기도 했다.연합

2006년 1월 서울을 찾아 개고기를 먹기도 했다.연합

신체적 열세 극복한 평정심

표도르가 2000년 종합격투기에 입문해 10년간 인류 최강의 사나이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얼음주먹’ 혹은 ‘얼음황제’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냉정함이었다. 중국 권법인 영춘권 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장량 치사오영춘권센터 관장은 ‘평정심’을 표도르의 최대 경쟁력으로 꼽았다.

“모든 무술은 체격과 힘의 열세를 속도와 기술로 극복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거대한 상대를 속도와 기술로 제압하려 한다면 우선 긴장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과 육체가 둘이 아니듯 일단 마음이 긴장하지 않아야 몸의 근육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 표도르가 예상하지 못한 각도에서 주먹을 뻗어 역전하거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번번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년 11월 미국 스트라이크포스 대회에서 열린 브렛 로저스와의 시합은 표도르의 무서움을 가장 잘 보여준 무대로 꼽힌다. 그동안 맞붙은 줄루지뉴나 최홍만, 팀 실비아 등 거인 파이터들은 덩치가 크다는 장점이 있었을 뿐 전체적인 기량이 정상급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격투스포츠의 메이저리그로 꼽히는 미국 UFC 무대를 정복했던 팀 실비아도 이미 내리막길에 오른 파이터였다. 로저스는 이들과 달랐다. 거구인데도 수준급의 타격과 그라운드 실력을 갖춘 유망주였다.

이날 표도르는 떠오르는 샛별 로저스를 만나 꽤 고전했다. 힘에서 밀린 것이다. 전세Red가 표도르 쪽으로 넘어온 것은 자신감을 얻은 로저스가 거침없이 파고들 무렵이었다. 로저스의 주먹이 표도르를 향해 날아간다고 느꼈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각도에서 표도르의 주먹이 나왔다. 주먹은 무서운 속도로 로저스의 턱에 꽂혔고 경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경기 직후 로저스는 “표도르의 주먹이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로저스는 흥분한 나머지 평정심을 잃었고, 표도르는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특유의 침착함을 잃지 않고 기회를 엿보았다. 그해 1월 시종일관 밀렸던 안드레이 알롭스키와의 대결에서도 그랬다. 알롭스키는 빼어난 복싱 실력을 앞세워 표도르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승리를 확신한 알롭스키가 방심한 나머지 무모한 공격을 시도할 때 표도르의 주먹은 이미 그의 턱을 강타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가 자신보다 강한 상대 요시오카 세이주로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미아모토는 침착했고 요시오카는 흥분했던 것이다. 요시오카가 인내심을 잃고 검을 뽑아들 때 미야모토는 목검을 들어 요시오카의 목 부근을 가격했다. 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요시오카는 즉사하고 말았다(미야모토가 실제로 요시오카와 격돌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삼색 추리닝이 어울렸던 아저씨

표도르가 2000년대 이후 한국에 종합격투기의 매력을 알린 선구자이자 절대 강자인 것은 맞지만 이것만으로 그의 인기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표도르를 잘 아는 국내 격투기 전문가는 그의 매력으로 빼어난 실력과 함께 친근함을 꼽는다. 전찬열 코리안탑팀 대표도 마찬가지다.

“표도르가 한국인에게 특히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절대 강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따뜻함과 겸손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운동을 오랫동안 해온 내 주변을 봐도 그런 선수는 없다. 프라이드FC 챔피언 시절에도 비싼 정장이나 액세서리로 겉멋을 부리기보다 아디다스 삼색 추리닝이나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을 고집했다. 실력이 뛰어난데다 겸손하기까지 한 최고의 선수였다.”

2006년 문화방송 예능 프로그램 과 2008년 SBS 에 출연했을 때에도 격투기 황제 표도르는 시종일관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으로 방송에 임했다. 에서는 연예인 출연자와 눈싸움을 벌였고, 상대방의 발목에 묶인 리본을 푸는 대결을 펼쳤다. 일부 팬은 지나치게 가벼운 구성이었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정작 표도르는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김남훈 UFC 해설위원은 “링 위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내뿜는 챔피언으로, 링 밖에서는 동네 헬스클럽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로 다가오는 표도르가 국내 팬에게는 색다른 존재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5~6차례 방문하며 표도르가 남긴 에피소드도 많다. ‘표도르 개고기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다. 2006년 1월이었다. 러시아 삼보 시범경기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표도르가 서울 잠실 역도경기장 로커룸에서 일회용 포장용기에 담긴 고기를 먹었다. 이 장면은 인터넷을 타고 전세계에 퍼졌다. 문제의 고기는 다름 아닌 개고기 수육이었다.

표도르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암 투병 어린이 환자를 찾는 등 한국에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 연합

표도르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암 투병 어린이 환자를 찾는 등 한국에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 연합

‘꿀도르’는 개고기를 좋아해

“(표도르가) 러시아에서 한국의 개고기를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개고기 타령을 했다. 개고기 전문 식당에 직접 갈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포장된 수육을 공수해서 먹였는데, 내가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삼보연맹 회장이라는 사람이 표도르에게 먹일 게 없어서 하필이면 개고기냐’며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삼보 시범경기 행사를 기획한 대한삼보연맹 문종금 회장의 말이다. 문 회장은 “한국 문화에 많은 관심을 보인 표도르는 김치를 나물 먹듯 잘 먹었고, 개고기도 맛있다며 아주 잘 먹었다”며 “뛰어난 실력 이전에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선수였다”고 말했다.

방문할 때마다 경복궁 등 고궁을 방문하거나 암 투병 중인 어린이 환자를 위해 병원을 찾는 등 한국에 많은 애정을 기울인 표도르가 그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행사나 광고에 출연하는 일도 많았다. 그의 국내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단체나 업체의 규모가 영세했던 탓이다. 한 전직 삼보인은 2008년 9월의 민망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당시 표도르는 한국 삼보중앙체육관 주최 삼보 세미나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표도르라고 하면 러시아에서는 삼보의 레전드, 말 그대로 전설인데 2008년 9월 한국에서 그가 다녔던 행사를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봐도 미안했다. 대중음식점이나 인삼업체 대리점을 찾아 사진 촬영과 사인회를 갖기도 했다. 표도르 초청 단체가 영세하다 보니 이런 업소나 업체로부터 방문 비용의 일부를 협찬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말도 안 되는 행사에 끌려다닌 탓에 (표도르가)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는데, 싫다는 내색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꿀도르 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선유 꿀 광고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 1월 대한삼보연맹이 개최한 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찾은 표도르가 한국양봉농협의 선유 꿀 광고를 촬영했다. 양봉농협에서는 표도르의 항공료와 체제비 명목으로 3천만원을 협찬하는 대신 표도르 출연 광고를 찍었다고 주장했다. 표도르의 경기 영상이 나온 뒤 그가 직접 꿀 음료를 마시며 “선유 꿀 좋아요”를 말하는 광고였다. 누가 보더라도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B급 광고였다. 선유 꿀 광고가 케이블 TV를 통해 나간 뒤 이는 ‘황제의 굴욕’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을 떠돌았다. ‘꿀도르’ 별명이 붙은 것도 그때였다.

표도르의 국내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업체가 제대로 된 곳이었다면 과연 3천만원 협찬을 조건으로 그를 B급 광고에 내보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신용문 대한킥복싱협회 사무국장은 “국내에는 아직까지도 격투 프로모션 및 ‘스포테인먼트’ 개념이 정착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세계적 선수를 초청했으면 그의 이미지도 함께 고려해 광고나 홍보 행사를 기획해야 하는데, 표도르의 국내 일정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일 때가 더 많았다”고 말했다.

너무나 인간적인 황제

‘꿀도르 사건’이나 음식점 협찬 등은 얼음황제 표도르로서는 참기 힘든 굴욕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표도르는 한 번도 불쾌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서울시도 아닌 일개 구청 명예홍보대사를 맡을 때도, 삼보 선수도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삼보 시범을 보일 때도 그는 웃었다. 심지어 무단으로 도용된 것으로 보이는 학원 전단지 사진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해맑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황제의 모습이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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