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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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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선 돈 쓸 일이 없다

빈털터리 유럽 여행기…

주워온 아보카도로 요리를 만들고 ‘빈집’ 숙소에서 따뜻한 파티를 열다
등록 2011-02-18 14:23 수정 2020-05-03 04:26

‘지와 다리오’의 남미 여행기가 끝나고 이번호부터 무대가 유럽으로 옮겨간다. 편집자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다리오는 인도 여행을 함께한 친구 카를로스에게 연락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그는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왔다. 카를로스는 브릭스턴에 있는 ‘스쾃하우스’(Squat House)에서 3년째 살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도시의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허가를 받기가 힘들다. 그래서 종종 돈 없는 집주인들은 100년은 되었을 것 같은 오래된 건물을 방치한다. 살지도 못하고 공사할 수도 없어서다. 이런 빈 건물에 들어가 허가 없이 사는 형태를 ‘스쾃’이라고 부른다. 한 개인이 평생 일해 돈을 모아도 살 수 없는 집…. 그들은 빈 곳을 찾아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집은 ‘따뜻한 가정’이라는 쉼터로서의 본질을 잃었다. 집은 돈이고 노후 대책이자 투자 대상이다. 스콰터는 그런 사회에 반대하고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가난한 이들을 지지하며 기꺼이 이 세상의 소외자가 되기로 자처하고 빈집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다.

영국의 ‘스 하우스’ 중에는 예술가들이 참여해 갤러리나 지역문화센터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지와 다리오 제공

영국의 ‘스 하우스’ 중에는 예술가들이 참여해 갤러리나 지역문화센터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지와 다리오 제공

카를로스의 집에 들어서자 아로마 향이 먼지를 덮고 있어서 더러운 냄새는 없었다. 동물도 없었다. 대신 잘 정돈된 거실에는 길에서 주워온 듯한 색색의 소파로 가득했다. 몇 해 전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을 점거해 살고 있었는데, 주방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사용해 만든 스페인 햄 ‘하몬’이 걸려 있었다. 대머리의 스페인 남자는 우리에게 따뜻한 음식을 해주려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그가 마련해준 스페인식 파이 ‘토르티야 데 파타타’(기름에 볶은 감자와 달걀을 섞은 것)를 맛있게 먹고 거실 소파에서 깊은 잠을 잤다.

5월이면 봄과 여름의 경계일 텐데, 5월의 런던은 쌀쌀하다 못해 추웠다. 우리는 런던을 걷고 또 걸었다. 살인적인 런던의 교통비 덕에 다리 운동 한번 제대로 했다. 걸으면 그 도시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우리는 영국의 뒷골목을 특히 좋아했고, 싸고 맛있는 커다란 초콜릿 머핀도 좋아했다. 불러주는 데는 없지만 갈 곳은 많았다.

런던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술을 즐기는 데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작은 채소가게 앞을 지나는데, 버리려고 내놓은 듯 약간 상해 보이는 아보카도 한 상자가 있었다. 더 이상 상품 가치가 없어서 버렸을 테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런던은 ‘프리건’(Freegan·음식을 재활용해 쓰레기를 줄이는 일종의 친환경 라이프스타일)으로 살기 좋은 곳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비했고 버리고 또 버렸다. 그럼 누군가는 그것을 주우면 된다. 아보카도 10개를 주워다 멕시코 음식인 ‘과카몰레’를 만들었다. 다리오는 멕시코 요리를 꽤 잘하는데, 간단하면서도 양이 많아 여러 사람이 나눠먹기에 좋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그날 밤도 거실에서 잤다. 그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여분용 담요를 주며 런던 감기에 걸리지 말라고 했다. 전날보다 덜 추운 듯한 느낌은 그곳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 덕분이 아니었을까. 담요에서는 오랫동안 빨래를 하지 않은 냄새가 났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우리가 그 담요보다 더 더러웠기 때문이다. 외풍이 심한 옛날 집에, 졸졸졸 힘없이 나오는 온수는 목욕을 망설이게 했다. 한국의 찜질방이 심하게 그리웠다. 5월의 런던은 나에게 너무 추웠다. 밤거리를 걸으며 구세군 체리티숍 앞에 사람들이 놓고 간 헌 옷을 뒤졌다. 그리고 정말 딱 추위만 피할 수 있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재킷 하나를 건졌지만, 아무리 추워도 나는 그 옷을 입을 만큼 이미지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아직 겉멋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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