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탄 보온병이 포탄이 됐다. 한나라당 대표가 불에 그슬린 연평도의 보온병을 들고 포탄을 걱정하는 뉴스 장면을 보면서 나는 눈사람을 생각했다. 눈사람은 쌩쌩한 바람이 부는 겨울 거리에 선 보온병이다. 일자로 뻣뻣하게 서서 제 몸은 비록 차갑지만 세상에 온기를 뿌린다. 눈사람을 보는 순간 눈은 따뜻해지고 동공은 커진다. 실제론 얼음에 가깝지만 포근함이 느껴지는 건 눈사람의 이미지 때문이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파는 하얀 호빵처럼 눈사람의 흰 몸통은 동글동글 다정한 리듬감을 가졌다. 원형으로 빚어낸 눈덩이가 대칭을 이루면서 위아래 사이좋게 붙어 있다. 두 개의 원이 결탁해 형상의 최소 요건인 머리와 배를 간신히 지탱한다. 군더더기 없이 미니멀하다.
누가 ‘복잡한’ 존재인 사람을 이렇게 동그라미로 인식하겠는가. 동그라미나 단순화한 점·선·면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건 어린이들의 시각이다. 꼬마들의 그림 속에서 공주는 역삼각형의 날씬한 개미허리를 가졌다. 아빠는 커다란 동그라미 얼굴이면 충분하다. 어른에게 ‘사람’은 무척이나 그리기 힘겨운 설명의 대상이다. 반면 꼬마들에게 ‘사람’은 제멋대로 그려볼 수 있는 아직은 미지의 물체다. 그래서 동요는 마치 메롱 표정을 짓듯이 눈사람을 골려먹는다. “눈썹이 우습구나. 코도 삐뚤고. 거울을 보여줄까. 꼬마 눈사람.” 거울을 보여준다니! 볕이 들면 스르륵 녹아 사라져버릴 눈사람의 운명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아이들에게 눈사람은 제 지휘권을 온전히 휘두르며 데리고 노는 친구이자 장난감이다.
재치 넘치던 이탈리아 출신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도 꼬마들에게 사람이나 나무를 그리면서 놀게 했다. 한번은 “너희가 되고 싶은 모습을 그려봐”라고 했더니 꼬마들은 왕관이나 화려한 옷 같은 사물이 아니라 간단한 사각형·삼각형으로 본래 몸의 형태를 확장해 그렸단다. 슥슥 팔 두세 개를 붙이거나 다리를 여러 개 그려넣으면서 ‘더 빨리 뛰고 더 많이 놀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다. 눈사람도 멀리서 보면 추상적인 하얀 원 두 개가 전부지만 눈덩이 굴리는 첫 작업이 끝나면 눈사람 제작자의 생활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1970~80년대 한국에선 눈사람에 밀짚모자도 씌우고 까만 숯덩이로 눈썹도 붙였다. 미국의 눈사람은 보통 눈덩이 세 개로 되어 있고 키가 크며 높은 코를 가진 경우가 많단다. 거울로 본 자기 얼굴이 눈사람의 숨은 모델인 까닭이다. 지난겨울 한 학교 운동장에서 본 눈사람은 내가 본 눈사람 중에서 가장 몸이 작았다. 지금은 녹아 사라졌지만 오직 눈덩이만 이용해서 눈·코·팔·다리까지 달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날렵하고 당찬 눈사람이었다.
어른들도 눈사람을, 정확히 말해 눈송이를 연구한다.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는 어린 시절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눈송이의 의아함에 제대로 답한다. 눈송이의 아름다운 세부 결정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온기·압력·포화도 등에 따른 패턴을 분석한다. 수증기의 움직임에선 카오스 운동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뜻깊은 눈송이 연구를 마친 뒤 수학자가 쓴 책의 마지막 장은 호기심 어린 첫 마음을 톡톡 두드린다. “반짝이는 실제 눈송이와 비교했을 때 눈송이에 관한 내 이야기가 얼마나 초라한지 잘 알고 있다. 더 배워야 할 것이 아주 많다. 눈송이는 어떤 모양일까? 눈송이 모양이다.”()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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