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K’가 제 이니셜을 찾았다. 이번엔 ‘H’, 허각(25)이다. 예선부터 결선 무대까지 3개월에 걸친 케이블TV 엠넷 의 대장정 끝에 우승한 허각은 2억원의 상금보다 더 값진 ‘슈퍼스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음모론·결정론보다 운명론에 한 표서인국이 우승한 지난해 도 화제였지만, 올해 는 지난해보다 몇 배 더 강력했다. 시청률로는 두 배 이상, 체감 시청률로는 다섯 배 이상 거셌다. 의 탈락자에 관한 얘기는 매주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궜고, 매주 금요일 밤 11시가 되면 친구들과 TV 앞이나 호프집에 앉아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문자투표를 하고 결과를 지켜보는 젊은 층의 응원 문화는 월드컵 국가대항전과 비견되기도 했다.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투표 과정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음모론과 ‘이미 우승자는 결정돼 있다’는 결정론, ‘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이다.
이 중에서 가장 귀를 솔깃하게 하는 건 운명론이다. 누군가의 의도적이며 악의적인 개입에 의해 프로그램이 움직이고 있다는 음모론이나 결정론은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를 떨어뜨리지만, 운명론은 드라마 속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이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그렇게 누군가 이길 수밖에 없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의 우승은 필시 운명이었다고 믿고 시작하는 의 법칙이 여기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 우승의 법칙 드라마를 가진 자가 살아남는다
는 기승전결을 가진 한 편의 드라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리얼리티쇼 프로그램 형식이지만, 이 프로그램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이야기다. 초반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도전자가 경쟁이 계속될수록 자신의 실력과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무대를 경험할수록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우승하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얘기가 전개될 때 이 프로그램은 가장 빛난다.
시즌1에서 서인국은 본선 첫 번째 무대에서부터 탈락 076위기를 겪었다. 그런 그는 결선으로 달려가면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며 경쟁자인 조문근을 앞서나갔고, 그렇게 우승했다. 허각 역시 마찬가지다. 장재인이나 존 박에 비해 도드라지지 않던 그는 톱3 무대에서 로 최고점을 받으며 치고 나갔다. 그렇게 막판 뒤집기나 다름없이 우승했다. 반전의 드라마다.
서인국과 허각이 만들어낸 또 다른 드라마는 그들의 개인사다. 서인국은 프로그램 초반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을 만큼 힘든 가정사를 털어놓으며 주목받았다. 그가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많은 시청자들은 해맑은 그의 미소에 감춰진 그늘을 보았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고 지금도 어머니를 만날 수 없는 허각의 사연도 화제였다. 환풍기 수리기사로 일하면서도 행사장에서 노래를 하며 막연히 가수를 꿈꿨던 그가 진짜 가수가 되는 이야기는 그 자체가 ‘레알’ 드라마다.
★ 성별의 법칙 탈락자의 남녀 성비는 항상 같다시즌1의 톱10은 남자 5명, 여자 5명이었다. 시즌2에는 1명이 추가된 톱11이 남자 5명, 여자 6명으로 꾸려져 본선 무대에 섰다. 흥미로운 것은 본선 무대를 거치며 차례로 떨어진 탈락자의 성비가 매번 같았다는 점이다.
시즌1의 본선 첫 무대에서는 이진과 박재은이 탈락했고, 시즌2의 본선 첫 무대에서는 김그림·김소정·이보람이 떨어졌다. 첫 번째 본선 무대의 탈락자는 100% 여자다. 그리고 두 번째 본선 무대. 시즌1에서는 정선국과 박나래가, 시즌2에서는 앤드루 넬슨과 박보람이 탈락했다. 세 번째 본선 무대에서도 시즌1에서 김주왕과 박세미가, 시즌2에서 김지수와 김은비가 고배를 마셨다. 네 번째 본선 무대의 탈락자는 각각 박태진과 강승윤으로 모두 남자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네 번째 무대가 끝나면 톱3가 결정된다. 준결승이나 다름없는 톱3 무대 역시 시즌1·2 모두 남자 2명과 여자 1명으로 성비가 같았고, 결승에 오른 이들은 모두 남자였다. 남자 둘이 결승에 올라 1명이 떨어진 것까지 더하면 시즌1과 시즌2의 본선 무대의 탈락자 성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남·여-남·여-남자-여자-남자’로 같다.
시즌1과 시즌2에서 모두 톱3에 오른 유일한 여자 도전자가, 그것도 강력한 우승 후보인 여자 도전자가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1의 첫 번째 본선 무대에서 길학미는 타샤니의 를 부르며 월등한 실력을 뽐내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심사위원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으며 1위로 통과했다. 시즌2에서 장재인은 첫 번째 본선 무대에서 남진의 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심사위원 최고 점수를 받았고, ‘슈퍼세이브’ 제도에 따라 가장 먼저 통과했다. 첫 번째 본선 무대에서 1위를 한 길학미와 장재인은 톱3 무대에서도 심사위원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문자투표에 밀려 탈락했다.
★ 악기와 춤의 법칙 악기 다루는 자, 춤추는 자는 떨어진다음악하는 이들이 모여드는 에는 악기를 들고 출연하는 사람이 많다. 시즌1에는 타악기인 ‘젬베’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문근과 기타를 치며 노래한 정선국이 있었다. 시즌2에는 기타를 들고 나선 이들이 부쩍 늘었다. 장재인과 강승윤, 김지수, 김그림이 기타를 쳤다. 악기는 ‘뮤지션’으로서의 자아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도구임에도 이들 모두 우승하지 못했다. 춤을 장기로 내세운 퍼포머형 도전자 역시 모두 우승과 거리가 멀었다. 시즌1의 김주왕·박재은을 비롯해, 시즌2의 김소정·이보람 모두 중도 탈락했다. 이들은 심사위원에게 “춤을 추면서 노래한 것을 감안해도 노래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평을 받아야 했다.
★ 감동의 법칙 감동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감동’은 가 강조하는 노래의 가장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감동은 쉽게 오지 않는다. 시즌1과 시즌2를 더해 30시간이 다 되는 방송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곡을 노래했지만 노래가 직접 손을 내밀어 시청자에게 감동을 전한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는다. 시즌1에서는 슈퍼위크 중 시각장애인 김국환이 팀원들과 함께 에이트의 를 부른 순간, 이효리가 눈물을 쏟았다. 시즌2에서는 장재인과 김지수가 서인영의 를 기막힌 솜씨로 불러냈을 때 박진영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또 김보경이 켈리 클락슨의 를 불렀을 때 엄정화는 눈물을 보였다. 노래가 전한 감동의 순간은 조명이 빛나는 무대에서 예쁜 옷을 입고 밴드의 연주에 맞춰 노래하는 본선 무대가 아닌,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무대에서 정직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는 슈퍼위크에서 찾아온다.
에 참가하는 수많은 도전자 중 몇몇은 이미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시즌1에서는 박진영이 기획한 SBS 에 발탁되며 ‘춤 신동’으로 유명하던 구슬기가 있었다. 한동안 대중에게서 잊혀진 구슬기는 를 통해 재도약을 시도했지만, 톱11에 들지 못했다. 시즌2에도 문화방송 오디션 프로그램 을 통해 아이돌 그룹 멤버로 데뷔한 정윤돈이 출연했다. 정윤돈은 슈퍼위크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오디션 프로그램 경험자로 가장 유명했던 이는 결승에 올라간 존 박이다. 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에서 톱20까지 올라간 존 박은 에 도전해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우승의 문턱에서 내려와야 했다.
★ ‘밉상’의 법칙 지나치게 욕심내면 떨어진다다양한 삶을 살아온 도전자들이 처음 팀 프로젝트를 하게 되는 슈퍼위크는 본선 진출자를 걸러내고 동시에 도전자 개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팀 프로젝트를 할 때 꼭 1~2명은 ‘밉상’이 된다. 시즌1에서는 지나치게 욕심을 내며 본인 위주로 무대
를 이끌어간 구슬기가, 시즌2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팀에 들어가려고 거짓말을 한 김그림이 ‘밉상’이었다.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의욕과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자신을 내세우는 욕심은 다르다. 시청자의 마음을 빼앗아야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밉상’들은 탈락하기 마련이다.
이 밖에도 에 관한 몇 가지 법칙이 더 있다. 케이블TV tvN <e>는 지난주와 이번주에 이어 에 관한 몇 가지 징크스 등을 공개했다. 먼저 ‘여자 심사위원을 울리면 떨어진다’. 로 이효리를 울린 김국환과 로 엄정화를 울린 김보경은 모두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엄친아·엄친딸은 안 된다’는 징크스도 있다. 미국 버클리 음대 학생 정선국과 카이스트 재학생 김소정,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제학과를 다니는 존 박 모두 우승하지 못했다. ‘마지막 순서로 노래하면 불리하다’는 생방송 무대에서 마지막 순서로 노래한 길학미와 강승윤, 장재인이 모두 탈락한 데에서 나온 징크스다. 생방송 무대에서 마지막 순서로 노래하면 앞서 노래한 도전자에 비해 문자투표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 방송이 소개한 또 하나 흥미로운 법칙은 ‘이승철이 좋은 평가를 하면 떨어진다’가 있다. 시즌1에 이어 시즌2에서도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이승철이 도전자에게 ‘완벽하다’며 최고 점수를 주면 탈락한다는 법칙인데, 묘하게 맞아떨어진 경우가 꽤 있다. 시즌1에서는 톱3 무대에서 길학미에게 “모든 장르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실력을 갖췄다”는 심사평과 함께 95점을 줬다. 시즌2에서는 본선 첫 번째 무대에서 를 부른 이보람에게 “노래와 춤 모두 완벽했다”는 평을, 본선 두 번째 무대에서 을 부른 박보람에게 “완벽하다”는 심사평을 했다. 길학미와 이보람, 박보람은 각각 그 무대에서 떨어졌다.
강승윤과 장재인 역시 각각 탈락한 무대에서 이승철에게 최고 점수를 받았다. 를 부른 강승윤에게는 “장점을 잘 살렸다”며 96점을 줬고, 를 부른 장재인에게는 “심사평을 쓰지 않을 정도로 눈을 떼기 힘들 정도의 무대”라는 평과 함께 97점을 줬다. 이승철은 그 전까지 강승윤에게는 75점이나 80점 등 낮은 점수를 줬고, 장재인에게는 93점 이상을 준 적이 없다.
뿐 아니라 경쟁을 통해 우승자를 가리는 다른 리얼리티 오디션·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시즌 몇 개를 거쳐 마치면 몇 가지 법칙이 생겨난다. 패션디자이너를 뽑는 미국의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 의 한국판인 (이하 )에서도 와 비슷하거나 정반대인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비슷한 법칙은 성비의 법칙이다. 시즌1과 시즌2에서 톱3에 든 이들은 똑같이 여자 2명과 남자 1명이었다. 와 정반대인 점은 우승자가 모두 여자였다는 것. 또 각 시즌의 우승자인 이우경과 정고운은 모두 첫 번째 미션의 우승자다. 처음에 잘한 도전자가 최종적으로 우승한다는 것은 시청자가 아닌 심사위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기준으로 우승자를 결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이 프로그램은 도전자들의 개인사보다는 미션에 대한 태도나 아이디어, 결과물의 완성도에 더 초점을 맞춘다.
프로그램만의 법칙으로 와 를 비교하면, 의 정체성은 더욱 확실해진다. ‘음악’과 ‘패션’이라는 장르 간의 차이도 존재하지만, 두 개의 프로그램은 추구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는 일관성에서 오는 확신보다 의외성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전문가적 정확성보다 대중적 보편성을 추구한다. 시청자 문자투표가 60%를 차지하는 이 프로그램은 무대 위에 오른 도전자에 대한 판단의 절반 이상을 그 순간을 함께하는 시청자에게 맡긴다. 10~20대 여성이 문자투표의 주요 층인 만큼 ‘여심’의 향방이 당락에 큰 영향을 끼쳐 결승 진출자가 모두 남성인 것도 납득이 가는 분석이지만, 프로그램이 결승까지 가면 ‘여심’이 전부는 아니다.
“시청자 감동과 지지가 프로그램 존재 이유”
TV칼럼니스트 정석희씨는 “이 프로그램에서 문자투표를 한다는 것은 ‘편’이 된다는 것”이라며 “실력도 중요하지만 과정 내내 보여주는 그 사람의 여러 가지 면을 보면서 그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마음을 내주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마음은 실력이 좋은 이에게 향하기도 하지만, 운동경기를 볼 때 지고 있는 팀을 응원하게 되는 것처럼 상황이 불리한 이에게 표를 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대중음악평론가 이민희씨 역시 “시청자는 드라마 같은 순간적인 자극을 보고 싶어한다”며 “스타성에 대한 확신보다 그 순간 시청자가 느끼는 감정의 크기로 도전자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한다”고 설명한다.
의 법칙을 말로 풀어내면 다음과 같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 순간 노래가 줄 수 있는 원초적 즐거움을 안겨주는 사람, 개인적 상황을 이겨내고 무대 위에서도 자신의 한계를 꾸준히 극복해나가는 사람, 시청자가 얼마든지 편을 들어주고 싶은 착한 사람, 마지막으로 ‘남자’라면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칙은 깨져야 한다. 제아무리 재미있는 드라마라고 해도 비슷한 내용을 세 번까지 봐줄 수는 없다. 이제 하나의 법칙이 남았다. ‘슈퍼스타의 법칙- 의 우승자는 슈퍼스타가 된다.’ 허각이 이 법칙을 증명해줄 수 있을까?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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