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 등장하는 ‘명함’ 장면을 기억하는지. 자신이 가진 것에 자부심 강한 주인공은 새로 찍은 고급 명함을 자랑 삼아 친구들 앞에 내놓는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우아한 금장 글씨가 새겨진 명함, 달걀 껍질로 만들었다는 최고급 재지의 명함, 품위 넘치는 워터마크가 찍힌 명함 등이 줄줄이 던져진다. 완전히 ‘존심’ 구긴 주인공은 극강의 명함을 내놓은 친구를 집으로 데려가 도끼로 찍어 죽인다.
자본주의사회의 소비심리를 신랄하게 보여주는 이 장면이 종종 떠오른다. 유모차를 끌고 백화점 같은 곳에 갈 때다. 비교적 저렴한 유모차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내 옆에 바퀴가 유난히 큰 ‘퀴$’가 선다. 내 유모차가 좀 작아 보이는 느낌이다. 좀 있다 그 옆으로 인형 유모차처 럼 아담하고 귀여운 ‘부가%’가 선다. 흠 좀 귀엽네. 이윽고 아기 좌석이 높아 엄마와 눈맞추기가 좋다는 ‘스토&’가 등장하면 올킬. 모두 100만원을 훌쩍 넘는 유모차들이다. 영화 주인공처럼 살의를 느끼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아이씨, 나도 그냥 좋은 거, 아니 비싼 거 사줄걸 그랬나?’
유모차는 아기 용품을 준비하는 엄마들에게 큰 고민거리 중 하나다. 갓난아기를 태울 수 있는 큰 덩치의 ‘디럭스’급은 싼 것도 40만∼50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비싼 용품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임신했을 때부터 밤새워 분노의 클릭질을 하며 핸들링이 어쩌고 양대면이 어쩌고 하는 설명과 엄마들의 사용 경험 등을 뒤져댔다. “스토&의 단점은 동네 마트를 끌고 가도 차려입고 나가야 한다는 점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니까요” 따위의 자랑 아닌 자랑질로 인해 요즘 인기 많은 스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허영심이다, 제품이 좋은 거다 등등. 여성들의 명품 소비 논란이 그대로 육아 용품으로 옮겨온 형국이다.
자칭 ‘지성을 갖춘’ 여성인 나 같은 소비자일수록 이런 선택은 피곤하다.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한 끗 있어 보이는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스토&는 킬. 너무 비싼데다 대놓고 자랑질하는 느낌이라 비위에 안 맞는다. 그것보다 저렴하면서 은근히 ‘간지’ 난다고 생각되는 제품군을 서너 개 추려 고심을 거듭했다. 실제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백화점에 가서 시운전도 해봤다.
이렇게 출산 직전까지 3∼4개월 동안 장고를 거듭해도 결론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왜냐. 사실 유모차 다 거기서 거기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소비자가 까다로운 세상에 핸들링 뻑뻑하고 도로에서 흔들리고 이런 유모차는 어디다 명함도 내밀 수 없다. 결국 유모차는 엄마의 취향이나 관심사, 경제적 지위 등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과시적 소비품인 셈이다. 그렇다면 평소 쇼핑하듯 간단히 내 취향이나 지갑 여건을 고려해 사면 될 것 같지만 여기에 중차대한 변수가 하나 더 걸려 있으니 바로 내 물건이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한 물건이라는 점.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들은 부럽지 않아도 앞에 쓴 것처럼 내 아이 옆에 더 좋은 유모차가 서 있으면 ‘나도 사줄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툭 튀어나온다. 정작 아이는 자기가 뭘 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수많은 밤을 고민으로 지새우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도 결론 내리지 못할 것 같던 유모차를 사기는 샀다. 그것도 나의 후보 리스트에 없던 엉뚱한 제품으로 순식간에 ‘바로 구매’를 눌렀다. 세일이라면 남이 갖다 버릴 물건도 사다 쟁여놓는 세일 중독자인 내게 ‘전시상품 초특가 품절 임박’의 빨간 글씨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치밀한 연구 분석 끝에 대충 산 유모차의 사용 후기를 한 줄로 쓰자면, ‘대만족, 역시 유모차 거기서 거기다’. 오늘 밤도 유모차 뭘 살까 고민하며 긴 밤 지새우는 엄마들이여 참고하시길.
김은형 한겨레 기자
‘엄마가 됐어요!’ 연재를 이번호로 마칩니다. 김은형 기자의 육아 칼럼은 한겨레 육아사이트 베이비트리(babytree.hani.co.kr)의 ‘내가 니 엄마다’를 통해 계속 연재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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