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아기 침대에 붙이는 아기 식별표. 남자아기는 파란 띠에 ‘나는 남자입니다’라고 적혀 있고, 여자아기는 분홍 띠에 ‘나는 여자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한겨레 김은형 기자
“몸무게 3620g, 아들입니다.” 분만실에서 선언과도 같은 이 말을 들었을 때, 물론 별 감흥 없었다. 요새 분만실에서 아이 성별을 알게 되는 사람은 없다. 태아 성감별이 법적으로 금지되던 시절에도 대부분의 개인 산부인과에서는 (낙태가 사실상 어려운) 임신 중기쯤 되면 “아빠 닮았네요”식으로 넌지시 알려주는 게 관행이었고, 진료실에 대문짝만하게 성별을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써붙여 “아기 옷은 무슨 색을 준비할까요?” 너스레를 떨 엄두도 못 내게 하던 내가 다니던 병원조차 올해 초 법규정이 바뀌면서 임신 32주가 되자 주치의가 상냥하게 “아기 성별 궁금하세요?” 물어오는 상황이 됐으니 말이다.
이렇게 때가 되면 어련히 알게 되는 성별이지만 임신 소식과 함께 궁금증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온라인 임산부 카페 게시판에는 아이 형체도 제대로 안 보이는 초음파 동영상을 올리며 ‘고수’들의 감식을 부탁하는 글이 수두룩하다. 이걸 보면서 떨떠름한 기분이 들곤 했다. 대한민국에서 성별이란 단순히 파란 옷과 분홍색의 선택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을 원해? 딸을 원해?” 따위의 질문을 용의주도하게 피해가면서 애써 무심한 듯 버티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증이 커지는 건 나 역시 어쩔 수 없었다. 보통 성별을 알게 되는 16주를 넘어 20주가 지나자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인터넷에 초음파 동영상을 올리는 엄마들을 흉보던 나는 한술 더 떠 동영상을 산부인과 의사인 회사 후배 아버지에게 보내 결국 알아내고야 말았다.
상황이 이상해진 건 그다음부터다. 성별을 묻는 주변 사람에게 아들인 것 같다고 하자 하나같이 딱하다는 표정과 함께 “딸 하나 더 낳아야겠다”고 위로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처음엔 정치적 올바름에 기반한 반작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라고? 정말 좋겠다” 반응한다면 정말 무식한 옛날 아줌마 같지 않은가. 그러나 측은한 눈빛과 딸예찬론이 계속되자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젠장, 오죽하면 태아 성감별을 법적으로 금지해온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딸이라서 행복한’ 세상이 된 거야? 아들 가진 게 죄야? 딸 가진 유세 하냐고! 아니나 다를까 카페 게시판에는 딸예찬론에 기죽은 아들 가진 예비 엄마들의 하소연도 가뭄에 콩 나듯 등장했다. “다들 아들이라 안됐다는 반응이니 실패한 기분이에요.”
쳇, 딸은 곱게 키워봤자 남의 식구 된다는 말 몰라? 창고에서 먼지 쌓인 옛 어른의 지혜를 꺼내 마음의 위로를 찾기 시작했는데…. 엄마는 나 애지중지키웠지만 시집와서 2주에 한 번 친정에 갈까 말까인데 시댁은 두세 달에 한 번은 ‘꼭’ 간다구. 나는 하루에 한 번 엄마에게 전화할까 말까지만 남편은 2주일에 한 번은 ‘꼭’ 시어머니와 통화하지. 대화? 딸뿐인 우리집은 너무 시끌벅적하잖아. 남편이 집에 가면 어찌나 조용한지 수험생 하숙을 쳐도 될 거 같애. 흠… 내가 졌다. 아들이라 좋은 점을 따져보다 보니 곱게 키워 남 좋은 일만 시킬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옛날에는 아빠들이 딸 아까워서 시집 안 보낼 거라고 농담 반 진담 반 했다더니, 급기야 아기 아빠에게 “울 아들 나중에 장가 보내지 말까봐”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우리 집 양육 목표는 고민할 것도 없이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잘 키운 아들 하나, 열 딸 부럽지 않다.’(그래도 영 불안한 마음이…)
김은형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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