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반갑구나. 우리 한번 멋진 육아일기를 써보자꾸나. 한겨레 김은형 기자
04:00 날카로운 통증에 번쩍 눈을 떴다. 어둠 속 TV에서는 정체불명의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스툴 위의 노트북도 불빛이 반짝반짝. 멍한 정신을 추슬러 이 통증의 정체는 무엇인지 인터넷에 들어가 뒤져본다. 가진통, 진진통, 진통주기, 이슬 등의 단어를 반복해 읽어봐도 내 상태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이것이 ‘글로 배운 출산’의 난점인가.
06:00 고통의 강도가 높아지지만 책에 나온 몇 분 주기가 아니라 뒤죽박죽이다. 전에 병원에서 보니 짐까지 싸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임신부도 있던데. 안 그래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응급실을 들락날락하다가 마을 나온 동네 아줌마 취급받고 있는 마당에 호들갑 떨며 갔다가 돌아오게 되면 이게 웬 망신. 게다가 오늘은 정기검진일. 2시간만 참아보자. 끄응.
08:00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병원에 갔다. 검진 시작 시간보다 30분 일찍 왔을 뿐인데 간호사는 냉랭하게 응급실로 내려가란다. 변장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응급실에 도착하니 예의 심박동 계측 기계를 배에 장착한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 혼자서도 할 수 있을 지경. 출산하게 되나요? 물어보니, 지켜봐야죠. 의사들의 전매특허 답변이 나온다.
10:00 입원 결정과 동시에 진통실 이동. 야호! 집에는 안 돌아가겠구만. 출근한 남편과 식구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나 취직됐어 하는 말투로, 나 드디어 아기 낳으러 가 선언한다. 그런데 아비규환의 비명과 신음 소리가 넘쳐날 줄 알았던 진통실은 적막강산. 두런두런 대화와 아주 미세하게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으… 아… 정도의 신음 소리를 내기도 겸연쩍은 분위기다. 내가 남보다 엄살이 심한가, 나는 이다지도 약한 인간이었단 말인가, 통증보다 존재론적 회의가 더 강하게 엄습….
12:00 하거나 말거나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 무통주사 놔준다던 간호사는 왜 함흥차사인가. 딴에는 긴장을 가라앉혀준다며 아이폰 이어폰을 꽂아주는 보호자에게 누가 이딴 거 달라고 했느냐며 짜증 내는 것으로 모자라 간호사에게도 언제 무통주사 놔줄 거냐 반복해 물어보며 짜증드립.
13:00 무통주사… 이것은 진정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더냐. 수술해달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 맞은 무통주사로 인해 ‘안아파’(anapa)라고 적혀 있는 약 이름을 보며 낄낄댈 수 있는 여유를 회복. 진통실로 찾아온 주치의에게 물었다. 언제쯤 거사를? 이르면 저녁 6~7시, 늦으면 밤을 넘길 수도 있고요. 안아파… 너만 믿는다.
14:00 무통주사만 맞으면 감각이 마비돼서 진행이 늦어지기 때문에 맞는다는 촉진제가 다시 고통을 준다. 하지만 날카로운 통증이 아니라 묵직한 통증이라 견딜 만하다. 희한한 건 통증이 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게 된다는 사실. 마치 〈TV 동물농장〉에서 보던 출산하는 캥거루나 팬더가 된 기분이다. 이래서 우리는 모두 같은 동물이었구나.
15:00 세상에 이런 일이… 진통실에서 분만이 진행된다. 정확하게 아기가 쏙 나오기 직전까지의 분만이 여기서 진행된다. 자세, 소리 내며 힘주기, 모든 게 분만실에서만 이뤄지는 것으로 알았던 내용들이다. 옆에 있던 보호자는 적나라한 성교육 비디오를 보는 이나중탁구부원의 표정(호기심+공포)으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다. 정신없으면서 조금… 어처구니도 없다.
16:00 분만실에 들어간 지 20분 만에 상황 종료.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던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하나 톡 떨어져 나에게 왔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이 새로운 무엇과 서른아홉 초짜 엄마의, 호러가 될지 코미디가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장르의 이야기다. 잘해보자고. 아가야.
김은형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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