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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분홍색을 허하라



‘분홍색 마니아’ 엄마도 아들 출산준비물 꾸러미는 어느새 푸르뎅뎅… 아기의 색상 선택권은 어디에?
등록 2010-07-07 14:49 수정 2020-05-03 04:26
엄마를 닮았는지 분홍색 속싸개를 유독 좋아하는 아기. 하지만 얘야, 너를 위한 분홍색 옷은 없단다. 한겨레 김은형 기자

엄마를 닮았는지 분홍색 속싸개를 유독 좋아하는 아기. 하지만 얘야, 너를 위한 분홍색 옷은 없단다. 한겨레 김은형 기자

임신 중 “분홍색 옷 준비할까요? 파란색 옷 준비할까요?”라고 차마 의사에게 묻지 못했다고 일전에 쓴 적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물어봤자 묵살당할 게 뻔해서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더라도 묻지는 못했을 거다. 너무 촌스럽잖아.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남자는 파랑, 여자는 분홍이라니, 클리셰라고 말하기도 남우세스러운 고정관념이다.

하지만 이 진부한 고정관념 역시 면면히 내려온 것이라 아기용품을 준비하면서 가끔씩 망설이기도 했다. 아들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파란색 제품을 보여주는 판매원들에게 굳이 분홍색으로 사겠다고 우기기도 성가셔서 그렇게 몇 번 쇼핑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금방 출산준비물 꾸러미가 푸르뎅뎅해졌다.

뭔가 편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성 구별의 고정관념 어쩌고 하는 고차원적인 자아비판이 아니라 그저 마음이 허전했다. 사실 나는 유치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분홍색 마니아였던 것이다. 사춘기 이후부터는 분홍색을 좋아한다는 게 ‘나 촌스럽다’는 자기고백같아서, 또 ‘러블리’와는 거리가 먼 외모 때문에 가급적 자제하고 살았지만, 잊을 만하면 분홍색 바지에 분홍색 웃옷을 입고 나타나 “너 미쳤냐”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온 나다. 채우지 못한 나의 갈증을 아기에게 투사하기로 작정한 나는 담요와 속싸개, 딸랑이 같은 걸 분홍색으로 구매하며 대리만족을 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아기 옷 구매에 열을 열리게 된 이 시점에서 몹시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 아이를 위한 분홍색 아기 옷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진짜? 거짓말!이라고 반응하실 분 많을 거다. 백화점 아기용품 코너에 가면 절반이 분홍색인데 분홍색이 없다니.

분홍색 옷은 모두 여아용이다. 여아용이라도 사주면 되지라고 말씀하시는 독자, 분명 애엄마는 아닐 거다. 같은 티셔츠라도 파란색은 그냥 파란색이다. 그런데 분홍색 티셔츠의 앞에는 커다란 리본이, 소매에는 주름 넣은 퍼프가, 밑단에는 오글오글 레이스가 달려 있다. 마치 ‘난 여자니까 더 이상 아들이냐 딸이냐 물어보지 말라규~~!’ 외치는 듯하다. 굳이 아기 때부터 성 구별을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과도하게 ‘걸리시’한 옷을 입히기엔 우리 아기의 외모가 지나치게 ‘보이시’하기도 하고, 또 사내아이한테 굳이 ‘나 여자예요’라고 주장하는 옷을 입히기도 그렇다.

물론 찾아보면 남아 옷이라고 해도 파란색만 있는 건 아니다. 민트색(그래봤자 파란색의 변종 아닌가)이나 갈색도 있고 빨간색 옷도 있긴 하지만 유독 분홍색만은 찾아보기 힘들다. 요새는 성인 남성복 중에도 분홍색 셔츠가 흔한데 0~3살 아기 남자옷에만 분홍색이 마치 금기처럼 안 보인다.

왜 그럴까? 그 나이 때는 외모보다 옷차림으로 성별을 구별하기 때문에 보는 이가 실례를 범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유아의류 브랜드들의 사려 깊은 디자인 정책일까? “그놈 참 장군감이네” “딸이거든요” 싸해지는 사태 등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휴머니즘 넘치는 디자인 정책일지는 모르겠지만 미학적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고 싶다. 분홍색은 피부가 뽀얀 아기들(남녀 모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다. 단지 사내아기란 이유로 자신의 외모를 가장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색상 선택권을 박탈당하는 건 인권 차원의 문제다. 확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라도 제출할까 보다.

요즘 분홍색 남아복 찾기에 혈안이 된 나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 티셔츠에 레이스 좀 있으면 어때, 점퍼에 프릴 좀 있으면 어때. 이러다가 공주 원피스까지 집어들게 될까 두렵다.

김은형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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