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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스포츠? F4만 즐기란 법 있나!



승마·패러글라이딩·수상스키 알뜰하게 즐기는 사람들… 대중 향해 손 흔드는 럭셔리 취미의 세계
등록 2010-07-21 22:32 수정 2020-05-03 04:26
귀족 스포츠? F4만 즐기란 법 있나! 날지니 패러글라이딩 클럽 제공

귀족 스포츠? F4만 즐기란 법 있나! 날지니 패러글라이딩 클럽 제공

“이모, 여기 통닭 한 마리 추가요!”

한여름 금요일 밤, 통닭이 불티난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대학가에서 숯불통닭집을 운영하는 최순희(47)씨의 손이 바쁘다. 매장엔 에어컨이 돌고 돌아도 뜨거운 기름이 끓는 주방에는 더운 김이 훅 끼친다. 오늘 밤에만 몇 마리째인지, 닭 한 마리를 기름에 넣자마자 또 추가 주문이다. 밤을 꼬박 새우고 토요일 아침 7시가 돼서야 가게 문을 닫는다. 최씨의 몸에는 닭튀김 냄새가 깊이 배었다.

그로부터 3시간 뒤, 경기 포천의 한 승마장에 최씨가 나타났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까만 승마 모자를 쓴 차림이다. 윤기가 흐르는 갈색 말 위에 올라앉은 최씨의 얼굴에선 피로감을 찾아볼 수 없다. 살살 걷기 시작하던 말이 조금씩 속도를 낸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최씨의 몸이 리듬을 탄다. 그는 “47년 삶에서 이렇게 좋은 순간이 없었다”고 승마의 즐거움을 표현했다.

말을 탄다, 몸이 리듬을 탄다
한국마사회는 뇌성마비 등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재활승마를 지원하고 있다. 말을 타고 들판을 거니는 동안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도 치유된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한국마사회는 뇌성마비 등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재활승마를 지원하고 있다. 말을 타고 들판을 거니는 동안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도 치유된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한국에서 승마는 드라마 의 ‘F4’나 하는 ‘귀족 취미’로 여겨졌다. 수상스키, 패러글라이딩, 경비행기는 어떤가. 일상을 벗어나 시원하게 날아오를 수 있는 취미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 취미에 도전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귀족 스포츠’의 대중화가 감지된다.

최씨가 승마를 시작한 때는 지난 3월. 몸도 마음도 최악인 때였다. 그는 2005년에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큰돈을 잃었다. 이후 그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될까 노심초사하며 웃음을 잃어갔다. 지난해에야 남편이 알게 됐다. 자책감과 함께 어서 돈을 메워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들어 우울증에 걸렸다. 우울증에 걸려서도 일만 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동네 이웃이 “내가 승마를 하는데 같이 하자”고 했다. ‘승마’라는 말에 돈 걱정이 먼저 들어 손사래를 쳤다.

구경이나 한번 가자 한 것이 5개월째다. 이제는 말 타러 가기 며칠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 달에 두 번, 토요일 아침에 가게 문을 닫고 ‘승마 정모’에 참석하는 최씨는 1시간 동안 말을 탄 뒤 동호회 회원들과 점심을 먹는다. 집에 돌아오면 대략 오후 2~3시. 바로 가게 문을 열어야 한다. 그래도 온몸에 기운이 넘친다. 우울증이 사라졌다. “처음으로 나를 위한 취미를 가져봤다”는 그의 ‘승마 자랑’은 끝이 없다.

그에게 승마를 권한 사람은 다음 카페 ‘승마동호회 페가수스’(cafe.daum.net/Riding)를 운영하는 최옥두(49)씨였다. 2000년부터 운영해온 페가수스는 온라인 회원 수만 5391명이다. 승마지도자 2급 자격증이 있는 최씨는 동호회를 이끌며 회원들에게 직접 승마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주말에는 ‘승마 정모’를 하고 수요일 야간에도 2명 이상의 신청이 있으면 승마를 하러 간다.

비용은 얼마나 들까? 페가수스에서는 처음 10회까지는 5만7천원씩, 그 이후에는 5만3천원~5만5천원을 받는다. 이 금액에는 말 대여, 승마 용품 대여, 승마 교육, 점심 뒤풀이 비용, 교통비 등 하루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이 포함된다. 정모가 없는 평일에도 각자 승마장에 찾아가 4만5천원을 내면 개인레슨을 받을 수 있다. 한 달에 두 번 승마를 즐기는 최순희씨는 총 11만원을 지출한다. ‘3개월에 15만원’ 광고에 혹해 헬스클럽을 끊었다가 몇번 가고 마는 것보다 값지게 돈을 쓴다는 느낌이다.

승마를 무료로 즐기는 방법도 있다. 지난해까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 승마 강습’을 운영해온 마사회가 올해부터 ‘전국민 말타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농어촌 거주 학생 승마 스쿨, 여성 승마 스쿨 등을 열어 올해 들어서만 총 1985명에게 승마를 가르쳤다. 7월에는 ‘엄마·아빠와 함께하는 승마스쿨’과 ‘일반인 승마스쿨’이 진행 중이다. 말산업 포털사이트(horsepia.com)에 승마 스쿨 모집 공고가 올라오면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마사회는 장애인을 위한 재활 승마도 지원하고 있다.(문의 02-509-1695)

각박한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는 ‘취미’에 대한 도전과 투자를 가속화한다. 여인성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교수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행복이란 것이 결국 여가를 어떻게 보내느냐의 문제가 된다”며 “사람들이 더 과감하게 취미 활동에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그동안 ‘귀족 스포츠’로 여겨져 온 종목들이 ‘보는 스포츠’에서 ‘하는 스포츠’로 변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곤(47)씨는 하늘을 난다. 2006년에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했다. 공무원인 그는 당시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거의 공황 상태에 이르렀다.” 처음엔 ‘술’로 풀려 했다. 업무를 마치면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몸도 마음도 더 망가졌다. ‘뭔가 특별한 곳에 나 자신을 맡겨서 현실을 잊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텔레비전에서 패러글라이딩으로 푸른 하늘을 나는 장면과 마주쳤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날지니 패러글라이딩 클럽’(cafe.naver.com/nalgenie)이란 인터넷 카페를 찾았다. ‘눈팅’만 하다 처음 구경을 간 날, 그는 널따란 활공장에서 가슴이 탁 트이는 경험을 했다. 처음 패러글라이딩에 몸을 맡겨본 날, 어깨를 짓누르던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목표는 “동호회원들과 함께 70살이 넘도록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것”이 됐다.

비행하는 날의 하루는 이렇다. 우선 토요일 밤, 몸을 정갈히 하고 일찍 잔다. 일요일 아침 9시,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 모인다. 기상 상황을 확인한 뒤 비행 장소를 정해 떠난다. 초창기에는 돈을 내고 사용하는 활공장을 찾지만 경험이 쌓이면 넓고 평평한, 활공하기 좋은 장소를 여럿 알게 된다. 아는 만큼 싸다. 활공장에 올라 장비를 입은 뒤 서로 도우며 비행을 한다. 그리고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집으로 돌아온다. 꽉 찬 하루다.

‘날지니 패러글라이딩 클럽’ 소속 김기곤씨는 지난 4월 경북 청도에서 하늘을 날았다. 김기곤 제공

‘날지니 패러글라이딩 클럽’ 소속 김기곤씨는 지난 4월 경북 청도에서 하늘을 날았다. 김기곤 제공

자전거·골프보다 적은 비용으로 하늘 난다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한 뒤 김씨는 직장에서 근무할 때 아바의 (Eagle)을 듣는다. 자유롭게 비상하는 독수리를 떠올리면 지난 주말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미소가 흘러나온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생긴 것은 덤이다. “패러글라이딩은 자연을 거스르는 순간 사고가 나기 때문에” 자연에 순응하고 조급해하지 않게 됐다. 비행하러 산꼭대기 이륙장에 올라가는 순간을 일주일간 기다렸다 해도 그날의 기상이나 자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욕심부리지 않는다.

‘날지니’ 클럽장인 이일구씨는 “패러글라이딩은 고급 자전거보다 비용이 덜 든다”고 강조한다. 외산 산악자전거(MTB)의 경우 100만~200만원이 중저가이고 300만~700만원대 제품이 주류다. 고급 부품을 모아 조립한 자전거는 1000만원을 넘기도 한다. 패러글라이딩 장비는 새 것이 400만~500만원, 중고가는 250만원 정도다. 장비 구입 이후에는 특별한 비용이 들지 않는다.

김씨의 지인들이 많이 하는 골프와 비교해도 차라리 경제적이다. 골프의 경우 골프채 풀세트를 장만하는데 수백만원이 든다. 실내 골프 연습장조차 한 달에 10만원이 넘고 골프화·골프의류를 구입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승마 동호회의 한혁(25)씨는 “골프장 1회 나갈 비용이면 한달 내내 주말마다 승마를 즐길 비용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물론 장비를 처음부터 구입할 필요도 없다. 이일구씨는 “초보자의 경우 일단 동호회에 나오면 장비 대여와 무료 강습이 가능하니 장비 살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본격적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하기 전, 일반 참여는 무료다. 정식 교육을 원한다면 한국활공협회(www.khpga.org)에 등록된 패러글라이딩 학교인 ‘패러스쿨’을 이용하면 된다. 강습비는 5~6주 기초 과정이 30만원 안팎이다. 강사와 함께 타는 2인승인 ‘탠덤비행’ 기본 과정은 1회 7만원이다.

한 가지 종목에 만족하지 않는 동호회도 있다. 다음 카페 ‘스노우보드와 래프팅’(cafe.daum.net/ras)은 ‘전방위’다. 3만5740명이 가입한 이 카페에서는 여름엔 수상스키와 웨이크보드를 타고, 겨울에는 스노보드를 탄다. 한 달에 두세 번 승마 강습이 있고, 번지점프·래프팅·인라인스케이트 모임도 활발하다. 현재 이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이영후(27)씨는 “회원이 많다 보니 그중에는 인라인스케이트, 스노보드, 수상스키 등 다양한 종목을 전문가 수준으로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 모임 안에서 강습이 가능한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꼽는 수상스키의 장점은 ‘신선함’이다. “도시에서는 인터넷 게임, 영화 감상 같은 일밖에 할 수 없는데 수상스키를 타면 자연과 인간이 한 몸이라는 신선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한다.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뒤 회사에 취직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그는 수상스키를 타면서 “정신이 맑아졌다”고 했다. 수상스키를 타는 데 내는 돈은 1회 1만6천원이다. 동호회를 통하니 ‘단체 할인’을 적용받는다. 수상스키를 시작하면서 술과 담배를 끊었다는 이씨는 “내게는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자랑했다. 술 마실 돈 한 번을 아끼면 수상스키 몇 번을 탄다.

다음 카페 ‘스노우보드와 래프팅’ 동호회의 한 여성 회원이 웨이크보드를 타고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고 있다. 스노우보드와 래프팅 제공

다음 카페 ‘스노우보드와 래프팅’ 동호회의 한 여성 회원이 웨이크보드를 타고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고 있다. 스노우보드와 래프팅 제공

인터넷 동호회 기반으로 대중화한 ‘귀족 스포츠’

‘럭셔리 취미’를 즐기는 이들의 공통분모는 ‘동호회’다. 대부분 인터넷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이 때문에 최근 10년 안에 생겨난 곳이 대부분이다. 날지니의 김기곤씨는 “비행만큼이나 팀원들과 정을 나누는 시간이 즐겁고 소중하다”며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패러글라이딩이란 이름으로 모여 조화하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승마 동호회의 최순희씨도 “승마하러 가기 전에는 소풍 전날처럼 들뜨는데, 이는 동호회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 인생의 활력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취미’는 세 가지 뜻을 가진다.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감흥을 느껴 마음이 당기는 멋’이다(국립국어원 ). 그동안 ‘귀족 취미’로 동떨어져 있던 스포츠들이 온라인 동호회를 통해 ‘인간의 정’으로 끈적하게 엉겨 새로운 ‘감흥’을 탄생시켰다. 같은 꿈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하늘을 날고 말 달릴 수 있어 행복해진다.

“할 수 있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

한국의 ‘럭셔리 취미’는 그렇게 대중화의 길을 걷고 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김기곤씨는 “할 수 있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며 일단 시작하라고 권한다. 승마를 하는 최순희씨는 “혼자 하기 아까워 다음주부터는 친구도 데려갈 생각”이라며 ‘직접 행동’에 나섰다.

LG경제연구소는 ‘2010년 주목할 7가지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하비 홀릭’을 선정했다. 하비 홀릭이란 특정 취미와 관심사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주 5일 근무제로 인한 여가 시간의 증가, 인터넷 커뮤니티 확산, 개인소득의 증가 등이 하비 홀릭 트렌드의 배경으로 꼽힌다.

어쩌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노동의 일상을 잊기 위해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을 토해내 ‘꿈의 세계’에 잠시 머물다 다시 노동하러 가는 일은 잔혹한 ‘순환’일 수 있다. 하지만 물 위를 달리거나 초원을 말 달리고 싶다면, 푸른 하늘을 날고 싶어 가슴이 뛴다면 ‘선배’들의 말에 한번 귀 기울여볼 일이다. 우리에겐 갈수록 좀더 강한 ‘일상 탈출’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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