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 감독이 태어난 지 100년을 맞았다. 이 전설의 거장을 되새기는 특별전이 마련되었다. 7월1일부터 서울 한국영상자료원, 필름 포럼,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과 부산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두 달간 열린다(상영 일정 각 기관 홈페이지 참조. www.koreafilm.or.kr, www.filmforum.co.kr, www.jpf.or.kr, cinema.piff.org)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름 뒤에는 대개 을 떠올린다. 지금도 서구 영화제에 한국 영화가 가면 상을 받네, 마네 ‘찌라시’ 언론이 호들갑을 떠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구 콤플렉스가 있던 일본에서 의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은 사건이었다. 1950년에 만들어졌으나 일본에서 묻혔던 이 영화가 이듬해인 1951년에 뒤늦게 베니스에서 수상하면서 이후 10여 년간 구로사와는 늘 서구 영화제에서 환대받았고, 일본에서 절대 권력을 누렸으며 이윽고 전설이 되었다. 구로사와는 자서전에 의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이 “자고 있던 일본 영화계의 귀에다 물을 퍼붓는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사실, 이것은 구로사와 자신의 감독 경력에 극적인 반전을 마련해줬다. 의 시사회 때 제작사인 다이에이의 사장이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라고 일갈하고 자리를 떴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질 만큼 구로사와의 영화는 일본 영화계의 전통에 반하는 것이었다.
연출 직후 구로사와는 쇼치쿠영화사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를 찍었다. 구로사와는 영화사 간부들과 충돌했으며, 흥행과 비평도 좋지 않았다. 의기소침해 있던 구로사와에게 다이에이영화사 쪽에서는 차기작 제작 취소를 통보했다. 그날 우울했던 구로사와는 집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당분간 일본 영화계의 찬밥 신세가 될 걸 절감한 그는 강에 낚시를 하러 갔다. 강 속에 낚싯줄을 던지자 바로 뭔가가 걸리면서 낚싯대가 두 동강이 났다. ‘악운이 따르면 매사가 이렇구나’라는 생각에 구로사와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밀어젖힐 기력도 없는 구로사와에게 그의 아내가 뛰어나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요?” “뭘 말이오?” “이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했어요.” 그때까지 구로사와는 이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됐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것으로 그의 영화 인생은 역전됐다.
수상 이전에 구로사와가 조금씩 일본 영화계의 기피 인물이 됐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다른 일본 영화계의 거장들과는 달리 구로사와의 영화는 이단적이었다. 의 초반 장면에서 구로사와는 라벨의 를 배경음악으로 썼는데 이는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의 다른 장면에서 미후네 도시로가 연기하는 산적이 사무라이의 부인과 교접하고 미친 듯한 환희에 들떠 숲 속을 달릴 때, 구로사와는 카메라를 역광에 비춰 촬영했다. 햇볕을 정면으로 비추며 촬영한다는 것은 당시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구로사와의 영화는 제작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다. 의 제작사인 영화사 간부들은 라쇼몽(한 궁궐의 남문) 하나만 세트로 지으면 촬영할 수 있다는 구로사와의 말에 혹해 제작에 들어갔지만, 결국 구로사와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 라쇼몽 세트를 짓는 데 들어간 돈이 다른 영화의 전체 제작비만큼 됐기 때문이다. 구로사와는 또 도스토옙스키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일본 영화로 옮겨오는 데 열심이었고, 존 포드의 서부영화를 일본식으로 재해석한 사무라이 영화를 만들었다.
요컨대 구로사와는 돈도 많이 들고 서구 영화와 유사한 일본 영화를 만들었으며, 그런 취향이 보수적인 일본 영화계에서는 이상한 취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52)가 베니스에서 은곰상을 받고 촬영에만 1년6개월이 걸린 대작 (1954>가 개봉해 또 베니스에서 은사자상을 받은 것은 물론 흥행에서도 성공하자 구로사와의 유명세는 하늘을 찔렀다. 그 뒤에 만든 (1957)이나 (1958) 등의 영화는 요즘 기준으로 봤을 때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대작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구로사와는 (1961), (1962) 등의 영화로 사무라이 검술 영화의 유행을 일으켰으며, 주인공 사무라이의 칼을 받은 상대편 무사의 몸에서 피가 1m 이상 뿜어나오는 식의 장관을 연출하면서 시대극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 공헌했다. (를 말 그대로 베낀 것이 마카로니 웨스턴의 효시인 세르지오 레오네의 다. 는 미국 서부극을 사무라이 활극으로 비튼 것이었으니, 동서양 활극은 서로 거울처럼 마주했던 것이다.)
서양 명장들의 동양인 아버지
(1965)은 인본주의 가치를 지향하는 의사의 삶을 소재로 한 굉장한 볼거리의 도덕극이었으며 일부에선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추앙하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구로사와의 영화가 그만큼 돈을 많이 벌어들이지는 못한다는 제작자들의 불평이 나오고 일본 영화산업 전체가 기울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부터 구로사와의 경력도 위기에 처했다. 일본 영화산업이 전성기에 있던 1930년대에 연출부 제10조수로 출발한 구로사와는 메이저 스튜디오가 궤멸하는 일본 영화산업의 복판에서 ‘일본은 너무 좁다’고 불평했다. 할리우드와 합작하는 두 건의 기획, 와 의 연출이 무산되면서 구로사와는 실의에 빠졌다. 특히 의 무산으로 깊은 실의에 빠진 그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동료 감독들과 제작사를 꾸려 만든 (1970)도 중후한 휴머니즘 드라마지만 흥행에 실패하자 구로사와는 더 이상 일본 자본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었다. 옛 소련에서 만든 (1976) 이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의 도움으로 (1980)를 찍었고 프랑스 자본으로 (1985)을 만들었다. (1990)에는 그의 또 다른 정신적 제자 마틴 스코세이지가 반 고흐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너무 서구적이라는 비판을 일본 영화계 내부에서 들은 구로사와는 그에게서 존 포드의 부친상을 보는 미국 감독들의 존경을 받으며 당당하게 말년의 영화 경력을 마무리했다.
를 만들어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을 즈음인 1980년에 구로사와는 이미 세계 영화계의 레전드가 돼 있었다. 5년 뒤인 1985년 이 제작되고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프랑스 저명인사들을 상대로 한 대규모 시사회가 열렸을 때 는 ‘천황, 파리에 오다’란 헤드라인을 뽑았다. 그의 영화는 일본에서는 서구적이라는 평판을, 서구에서는 일본적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서구 영화의 문법에 ‘가부키’와 ‘노’(가무극)와 같은 일본의 전통 연행 양식을 결합한 그의 영화는 절충을 통한 완성의 극점을 보여줬다. 구로사와는 서구의 것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영화에 흡수했다. 구로사와는 사무라이 영화를 찍을 때는 존 포드의 서부극을, 시대극을 찍을 때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참조했고, 현대극을 만들 때는 도스토옙스키를 영감의 지주로 삼았다.
역동적 정중동의 미학그는 도스토옙스키처럼 등장인물의 고통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구로사와의 인물들은 휴머니티를 도덕적으로 재확언하는 매개인이고, 때로는 거의 피학적일 만큼 성실한 인간성으로 부조리한 상황을 견딘다. 등 구로사와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두고 일본 영화사가 사토 다다오는 이렇게 평했다. “그들은 누구와도 연대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사는 방식을 자신이 정하고 자신만의 고뇌로 혼자서 고통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는 인간이다. 그 극단의 폐쇄적인 태도 가 보통 사람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인다. 아마도 거기에는 일본인의 대세 순응적 경향이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강한 주장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로사와는 영화가 강력한 이미지의 환기력을 지니고 있음을 아는 시인이었다. 그는 과 같은 작품에서 셰익스피어의 시 운율을 시각적 상징으로 구체화했다. 를 원작으로 만든 에선 자신 내부의 악과 자연에 내재한 악의 유혹을 받아 파멸해가는 용맹스러운 남자의 이야기를 독특한 자연묘사에 실어 보여준다. 구로사와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잘 가꿔진 일본식 정원 같은 단아한 인공미의 정수를 보여줬다. 구로사와 영화의 놀라운 점은 서구 영화의 역동적 양식을 취한 것과 동시에 정중동의 명상적 리듬을 자신의 영화에 체계적으로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서양과 동양의 미 감각이 교통하는 흥미로운 리트머스시험지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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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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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