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죽이다. 구글에서 찾은 ‘비스크’(bisque) 조리법을 본 순간 든 생각이다. 만두처럼, 죽은 여러 음식문화권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이름과 조리법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프랑스의 비스크, 이탈리아의 옥수수죽 ‘폴렌타’가 한국의 죽과 얼마나 다르겠는가. 심지어 조선시대 숙수들이 왕이 병들었을 때 체력 회복용으로 만들어 올렸다는 ‘타락죽’(우유로 만든 죽)을 생각하면, 적어도 죽에 관한 한 동서양은 이미 하나였다. 실크로드 이전에 ‘수프 로드’라도 있던 게 아닐까 상상하게 될 정도다. 코발트 원사를 펼친 것처럼 하늘이 시퍼런 5월 주말 오후, 다리를 긁적이며 쌀을 휘젓는 독신남의 고독도 만국 공통일 게다.
원래 비스크는 닭 육수와 우유, 버터, 밀가루, 소금 등으로 만든다. 이렇게 베이스를 만든 뒤 채소나 해산물 등을 추가한다. 닭 육수에 채소를 넣고 뭉근하게 끓이다 버터를 넣는다. 피에르 가녜르는 여기에 쌀과 스파클링 와인을 더했다. 그날 롯데호텔 ‘피에르 가녜르’에서 먹은 ‘쌀과 스파클링 와인 비스크’의 맛을 떠올렸다. 내 입맛에 쌀밥의 쫀득한 질감은 우유의 부드러움과 어울리지 않았다.
가스레인지 불을 2단으로 줄이면서 그 맛을 떠올렸다.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반바지 밖으로 나온 다리털을 간질였다. 조리법을 조금 변형하기로 했다. 닭 육수를 빼고 쌀밥에 물을 붓고 뭉근하게 끓였다. 입만 살았다는 말을 나는 종종 듣는다. 오늘 이 말은 옳지 않다. 피에르 가녜르의 비스크를 응용한 ‘고나무식 타락죽’을 내 두 손으로 만들고 있다.
타락죽의 맛은 버터에 달려 있음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지니(Isigny) 무염 버터의 포장지를 뜯었다. 노르망디의 이지니르부아(Isigny-le-Buat) 지역에서 생산되는 명품 버터다. 전날 백화점에서 덴마크 브리치즈와 함께 계산하며 1만4300원을 내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기껏 ‘빠다’ 하나가 이렇게 비싸다니. 버터를 죽에 녹였다. 소금간을 한 뒤 ‘카바’(에스파냐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일컫는 말)를 살짝 뿌렸다.
우윳빛 죽 한 그릇을 놓고 앉았다. 세종대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여봐라! 무수리를 들라 하라!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나무식 타락죽’은 말하자면 훌륭한 실패작이었다. 먹을 만했지만 별미는 아니었다. 숟갈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교훈을 곱씹었다. 교훈은 두 가지였다. 이지니 버터는 최고다. 그리고 오로지 단순하게 빵에 발랐을 때 최고의 맛을 낸다.
아무리 맛있는 버터도 버터만 먹지 않는다. 그러나 버터는 자신을 버리면서 빵을 살리고 죽인다. 편의점에서 산 싸구려 모닝빵 봉지를 뜯었다. 죽을 젓던 숟가락 뒤쪽으로 버터를 긁어 빵에 발랐다. 그리고 천천히 빵을 입에 넣었다. 한겨울 눈보라에 언 손을 난로 옆에 대는 것처럼, 무뎌져 있던 혀가 이지니 버터의 맛에 녹았다. 죽은 세계 공통 음식이다. 주말 낮 이지니 버터의 맛에 눈물 흘리는 독신남도 이탈리아나 프랑스에 2~3명은 있을 것 같다. 외로움도, 맛도 국경을 넘는다. 가녜르가 한국에 오고, 한국의 쌀로 비스크를 만들었던 것처럼.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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