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타락죽, 실패한 타락

등록 2010-06-03 17:16 수정 2020-05-03 04:26
타락죽은 훌륭한 실패작이었다. 대신 나는 싸구려 모닝빵에 최고급 명품 이지니 버터를 발라먹었다. 버터는 자신을 죽이고 남을 돋보이게 하는 최고의 조연이었다. 한겨레 고나무 기자

타락죽은 훌륭한 실패작이었다. 대신 나는 싸구려 모닝빵에 최고급 명품 이지니 버터를 발라먹었다. 버터는 자신을 죽이고 남을 돋보이게 하는 최고의 조연이었다. 한겨레 고나무 기자

이건 죽이다. 구글에서 찾은 ‘비스크’(bisque) 조리법을 본 순간 든 생각이다. 만두처럼, 죽은 여러 음식문화권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이름과 조리법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프랑스의 비스크, 이탈리아의 옥수수죽 ‘폴렌타’가 한국의 죽과 얼마나 다르겠는가. 심지어 조선시대 숙수들이 왕이 병들었을 때 체력 회복용으로 만들어 올렸다는 ‘타락죽’(우유로 만든 죽)을 생각하면, 적어도 죽에 관한 한 동서양은 이미 하나였다. 실크로드 이전에 ‘수프 로드’라도 있던 게 아닐까 상상하게 될 정도다. 코발트 원사를 펼친 것처럼 하늘이 시퍼런 5월 주말 오후, 다리를 긁적이며 쌀을 휘젓는 독신남의 고독도 만국 공통일 게다.

원래 비스크는 닭 육수와 우유, 버터, 밀가루, 소금 등으로 만든다. 이렇게 베이스를 만든 뒤 채소나 해산물 등을 추가한다. 닭 육수에 채소를 넣고 뭉근하게 끓이다 버터를 넣는다. 피에르 가녜르는 여기에 쌀과 스파클링 와인을 더했다. 그날 롯데호텔 ‘피에르 가녜르’에서 먹은 ‘쌀과 스파클링 와인 비스크’의 맛을 떠올렸다. 내 입맛에 쌀밥의 쫀득한 질감은 우유의 부드러움과 어울리지 않았다.

가스레인지 불을 2단으로 줄이면서 그 맛을 떠올렸다.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반바지 밖으로 나온 다리털을 간질였다. 조리법을 조금 변형하기로 했다. 닭 육수를 빼고 쌀밥에 물을 붓고 뭉근하게 끓였다. 입만 살았다는 말을 나는 종종 듣는다. 오늘 이 말은 옳지 않다. 피에르 가녜르의 비스크를 응용한 ‘고나무식 타락죽’을 내 두 손으로 만들고 있다.

타락죽의 맛은 버터에 달려 있음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지니(Isigny) 무염 버터의 포장지를 뜯었다. 노르망디의 이지니르부아(Isigny-le-Buat) 지역에서 생산되는 명품 버터다. 전날 백화점에서 덴마크 브리치즈와 함께 계산하며 1만4300원을 내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기껏 ‘빠다’ 하나가 이렇게 비싸다니. 버터를 죽에 녹였다. 소금간을 한 뒤 ‘카바’(에스파냐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일컫는 말)를 살짝 뿌렸다.

우윳빛 죽 한 그릇을 놓고 앉았다. 세종대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여봐라! 무수리를 들라 하라!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나무식 타락죽’은 말하자면 훌륭한 실패작이었다. 먹을 만했지만 별미는 아니었다. 숟갈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교훈을 곱씹었다. 교훈은 두 가지였다. 이지니 버터는 최고다. 그리고 오로지 단순하게 빵에 발랐을 때 최고의 맛을 낸다.

아무리 맛있는 버터도 버터만 먹지 않는다. 그러나 버터는 자신을 버리면서 빵을 살리고 죽인다. 편의점에서 산 싸구려 모닝빵 봉지를 뜯었다. 죽을 젓던 숟가락 뒤쪽으로 버터를 긁어 빵에 발랐다. 그리고 천천히 빵을 입에 넣었다. 한겨울 눈보라에 언 손을 난로 옆에 대는 것처럼, 무뎌져 있던 혀가 이지니 버터의 맛에 녹았다. 죽은 세계 공통 음식이다. 주말 낮 이지니 버터의 맛에 눈물 흘리는 독신남도 이탈리아나 프랑스에 2~3명은 있을 것 같다. 외로움도, 맛도 국경을 넘는다. 가녜르가 한국에 오고, 한국의 쌀로 비스크를 만들었던 것처럼.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