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재범의 2PM 탈퇴를 철회하라고 소속사 JYP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팬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지난해 9월 ‘2PM 재범 사태’가 한창일 때 인터넷에 꽤 많은 댓글이 달렸는데, 거기에는 몇몇 심상치 않은 표현이 있었다. “2PM 팬은 아니지만 이번 일로 팬이 돼버린” “자식 가진 엄마로서 참 안타깝더군요” “난 여자팬 아니고 29살 남자지만” 등. 당시가 2PM 팬덤에 매우 절박한 상황이었음을 상기한다면 뭔가 강박에 찬 표현들인 게 분명했다. 그녀·그들은 왜 이렇게 팬이 아닌 것처럼 연기한 것일까.
이른바 ‘일코’라는 게 있다. ‘일반인 코스프레(코스튬플레이)’의 준말인데, 팬심 있는 사람이 주변의 눈총을 받을까 염려스러워 팬이 아닌 척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가 나와도 후렴구 정도만 흥얼거리며 참아주고 안무가 절로 나와 움찔할지언정 ‘더쿠’(오타쿠)가 아닌 척 최선을 다한다.
팬들 사이에서 일코가 유행하는 건 무엇보다 한국 대중문화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 아이돌 팬질이란 ‘빠순이’와 ‘빠돌이’ 등 어두운 이미지로 표상된다. 대중음악 수준을 하향 평준화하고 ‘팬픽’ ‘사생팬’(연예인의 사생활을 좇는 팬) 등이 사회적 금기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아이돌팝이나 팬덤 문화는 지배적인 사회질서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팬들로서는 직장이나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조차도 어떤 타이밍에서 일코를 해제할 것인지 눈치를 보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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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아이돌 팬들은 개인적 자존감을 수호하고 사회적 정상성에 부합하기 위해서라도 일코를 고안하고 동원할 수밖에 없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영위하려는 요구와 싱싱한 섹슈얼리티에 감성을 헌납하기 원하는 욕구 사이에서, 팬들은 사회적 평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생활이라는 무대 위에서 기꺼이 ‘연기’한다. 그녀·그들은 각자의 응원법에 따라 목청을 높이다가도 자신들의 무대가 시작되면 팔짱을 끼거나 조용히 박수를 치면서 흐뭇한 미소를 날려준다.
일코는 확실히 이전 시기 팬덤의 문화적 실천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좋아하는 스타를 ‘동일시’해서 돌아오는 건 결국 빠순이·빠돌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그로 인한 심리적 상처였다. 그리하여 그녀·그들은 스타(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의 안위를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들기보다는 해당 아이돌을 ‘거리두며 존중’하는 방식으로 팬질의 양상을 전환한다. 팬덤의 집합적 경험이 축적되면서 사랑의 방식도 달라진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문화적 관행은 스타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 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윈윈 게임’이 되게 하는 일종의 전략적 실천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코 자체가 오늘날 팬덤의 문화적 실천에 해방구가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낙관하기 어렵다. 일코라는 자기 보존적 사랑의 방식은 지배적 담론 질서(예컨대 도덕적 엄숙주의나 문화산업의 관행)를 문제 삼기보다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결과적으로는 질서 자체를 잔존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아이돌이라는 (상품 이상의) 존재를 초과 노동을 통해 착취하거나 수익 보전을 위해 퇴출시키는 대중음악 산업의 관행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때로는 과거와 같은 자기 파괴적 충동이야말로 팬덤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과감히 일코를 해제하고 스타 시스템을 향해 팬들의 몫을 요구하는 것은 늘 어려운 문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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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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