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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슈메르씨

만화 <슈메르 성인>
등록 2010-05-13 13:48 수정 2020-05-03 04:26
만화 〈슈메르 성인〉

만화 〈슈메르 성인〉

추억의 외계인 드라마 (V)가 산뜻한 모습으로 재방문하고 있다. 기대와는 달리 옛날만큼의 짜릿함은 없다. 그동안 외계인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렇게 초우주적인 기술력으로 지구인을 잡아먹으려는 외계인의 이야기는 식상하다. 내게는 처럼 지구인과 어울려 사는 덜떨어진 외계인이 주는 알콩달콩한 재미가 좋다. 거기에 새로운 리스트를 추가해보자. 쓰나미노 유의 만화 .

‘슈메르 성인’은 아마도 지금까지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 중에서 가장 기술력이 떨어지는 족속이 아닐까? 현재의 지구보다 20년 정도 뒤처진 기술력으로 용케 우주여행에 나섰는데, 실수를 거듭해 지구로 날아오고 말았다. 이런 꼴이니 처음에는 큰 관심을 보이던 지구인도 곧 시큰둥해졌다. 그러나 고향 별로 돌아갈 재주도 없는 터라, 그들 중 대표 1명을 ‘이문명 친선대사’의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하기로 했다. 2년 동안 문제없이 버티면 슈메르 성인이 지구에 정착해도 좋다는 조건으로.

그렇게 시작된 대표 슈메르 성인의 지구 생활. 첫 정착지가 하필이면 융통성 없기로 소문난 일본이란 게 또 난코스다. 인감이 없으니 전입신고가 쉽지 않은 정도야 그렇다 쳐도, 이름을 말하라니 지구인은 전혀 알아먹을 수 없는 ‘혀를 말아 걸쭉하게 숨을 내쉬는 소리’를 내뱉는다. 귀찮은 공무원이 말한다. “그럼 그냥 슈메르씨로 하죠.” 알고 보니 그 완고한 원칙도 제멋대로 뒤집어버리는 게 지구인이었다.

이렇게 일본에 들어선 슈메르씨는 외모만 좀 특이할 뿐, 순박하고 원리·원칙에 충실한 시골 사람 같다. 그런데 그게 문제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 버튼을 안 누른다고 청년에게 무시당하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신호를 무시했다고 초등학생들에게 혼이 난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운전자에게 치일 뻔하는데, 항의를 하려고 그 차를 따라가던 중 동네 꼬마들이 자전거의 바람을 빼버린다. 그에게 지구는 원칙과 법규를 지켰다간 생존 자체가 어렵고, 사소한 선의를 베풀었다 낭패를 당하는 이상한 별이다. 나는 슈메르씨가 어처구니없는 수난을 당할 때마다 배꼽을 잡지만, 그 통렬한 문명 비판에 가슴이 찡해지기도 한다.

그래, 스트레스는 술로 풀어야지. 슈메르씨에게도 ‘음주면허증’이 발급된다. 슈메르 성인은 연령이 불분명해서 성년과 미성년을 쉽게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알코올 분해 능력에 따라 1종, 2종의 면허가 발급되는 것. 그리하여 주인공은 이문화 체험을 할 겸 ‘선술집’이라는 곳을 방문하는데, 곧 술꾼들의 포로가 되어 낙서투성이가 된 얼굴로 인증 사진을 찍히는 신세가 된다. 도와주고 싶지만 만화 밖의 나는 힘이 없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굳세어라, 슈메르씨”라는 대사를 소리 내어 따라하며 위로하는 수밖에.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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