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떠졌다. 오전 11시. 토요일에 일어나기에 이른 시간이다. 어제 마신 술로 아직 입이 쓰다. 속은 쓰리고, 손은 무겁고, 마음은 귀찮다. 일상은 기적이다. 어떤 쇠고기 성분도 없이 글루타민산 나트륨과 칼륨만으로 쇠고기 맛을 내는 라면 스프는 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맞먹는다. 라면은 ‘저렴한 기적’이다.
그러나 나는 값싼 기적을 거부한다. 결연하게 다짐하며 중얼거렸다, 이불 속에서. 이불 위로 입을 내밀고 나불댔지만, 실은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끙차. 무거운 몸을 일으켜세웠다. 해장은 해야 했다. 방금 전까지 겨드랑이를 긁적이던 손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비닐로 꽁꽁 묶은, 국물 내는 멸치를 꺼냈다. 아차, 다시마를 사오는 걸 깜빡했다. 부스러기만 남은 다시마를 탈탈 털어 손에 쥐었다. 음식 담당 기자를 너무 오래하고 말았다. 혀는 간사하다. 내 혀는 지갑을 배반한다. 남해 최고급 죽방 멸치(전통 어구인 죽방으로 잡은 멸치)로 우린 멸치 육수를 맛본 혀이시다. 혀는 값싼 기적에 만족하지 못한다. 할렐루야.
그래서 찾아낸 해장 음식이 멸치국수다. 정식 명칭은 ‘고나무식 무고명 멸치국수’. 고명이 없는 이유는, 귀찮아서다. 양은 냄비에 물 세 컵을 부었다. 중요한 것은 멸치의 내장을 따내는 것이다. 그대로 끓이면 국물이 쓰다. 물이 끓고 5분쯤 지나면 다시마를 건져낸다. 다시마를 너무 오래 끓이면 국물이 지나치게 되직해진다. 사실 육수를 우릴 때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지만, 새로 산 요리용 온도계를 사용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아직 끓지도 않은 국물에 담갔다. 77℃.
냄비를 하나 더 불에 올렸다. 물이 끓자 소면을 넣었다. 남은 과제는 ‘알 덴테’다. 파스타의 씹히는 식감을 ‘알 덴테’라 부른다. 소면의 탱탱함을 알 덴테로 부를 수 있을까? 국수에서 알 덴테를 구현하는 마술사는 소금이다. 물을 끓이다 소금을 조금 넣는다. 물이 끓으면 면을 넣고 면이 끓어오르면 찬물을 부어 가라앉힌다. 이렇게 가라앉히기를 한 번 더 반복한 뒤 면을 건져 찬물에 주물렀다.
11분25초 뒤 반바지에 허름한 반팔티를 입은 내 앞에 한 그릇의 멸치국수가 놓였다. 맑고 청아한 국물에 소면이 담겼다. 회색 재킷에 흰 와이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고 회색 구두를 신은 것처럼, 단조로웠다. 쩝. 냉장고를 뒤졌다. 왕건이다! 반쪼가리 남은 청량고추를 찾았다. 고추를 잘게 썰어 면 위에 올렸다.
신김치와 함께 한 젓가락 가득 면을 집어올렸다. 양파즙을 눈에 문지르면 눈물이 쏟아지듯, 혀밑이 순식간에 침으로 젖었다. 가수 오지은은 “당신을 향한 나의 작은 사랑은/ 뜨거운 물을 부으면 바로 되는 게 아니라/ 5분을 기다려요, 홍차 우려내듯이”()라고 노래했다. ‘5분’ 대신에 ‘10분’으로, ‘홍차’ 대신 ‘멸치 육수’라고 바꿔도 무방하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음식은 사랑이므로.
고나무 기자 한겨레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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