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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덕후’가 뒤집어놓은 전쟁

2차 세계대전 만화
등록 2009-11-27 11:25 수정 2020-05-03 04:25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소년들에게 전쟁놀이만큼 재미있는 게 있나? 30년 전의 아버지는 지게 작대기가 따발총인 양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친구들에게 갈겨댔다. 10년 전의 삼촌은 수십 명의 병사들을 번갯불로 지져 죽이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에 빠져 재수를 해야 했다. 오늘의 아이들에게는 더욱 많은 도구들이 있다. 애니메이션은 은하를 붕괴시키는 초광자 폭탄을 터뜨리고, 게임기는 좀비들을 향해 쏘아대는 기관총의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죄의식에 대해 묻자 답한다. ‘가짜 전쟁’이잖아.

좋다. 이제 한 만화가 그리는 ‘진짜 전쟁’을 들여다보자. 얼마 전 2권의 단행본으로 완결돼 나온 굽시니스트의 는 제목 그대로 인류사의 가장 큰 참극을 기록하고 있다. 만화는 한 도시에서만 수십만 명이 죽어간 실화들을 줄줄이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만화책을 든 채 배를 잡고 뒹군다. 쉴 새 없이 솟아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나는 이런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까?

정말로 독특한 만화이기에 글로 옮기기란 쉽지 않다만, 무리해서 말하자면 이렇다. 인터넷 곳곳에 서식하는 온갖 마니아들 중에 ‘밀덕후’(밀리터리 마니아)라는 존재가 있다. 그들의 총애를 받는 굽시니스트라는 만화가가 진지하게 ‘2차 세계대전’이라는 세계에 도전했다. 작정하고 밀덕후들의 세계관으로, 그들이 즐기는 모든 문화적 요소를 버무려서 그 전쟁을 재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미대에서 잘린 악플러로 등장한다. “너 유대인지지? 좌빨 냄새가 풀풀 나는 게 아주 골수네.” 그의 심복인 괴링은 만화 동인지 세계에 빠진 ‘골수 오덕’이고, 바이마르공화국의 정당들은 애니메이션 여전사들로 의인화된다. 초록색의 핀란드 군인들은 “휘바휘바” 하며 자일리톨껌을 씹고, 영국 여왕은 독일의 침공을 받자 섬 전체를 ‘천공의 성 라퓨타’처럼 하늘로 날려 올린다.

전쟁이 장난인가, 하는 소리도 나올 법하다. 그런데 이렇게 장난처럼 그린 전쟁의 세계가 너무나 절묘한 비유로 그 시대를 재현한다. 가벼운 웃음 뒤에 적지 않은 생각의 거리를 전해준다. 그런데 혹시 전쟁을 쉽게만 해설하는 만화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가 본 어떤 전쟁만화보다 어렵다. 이 만화를 제대로 독해하려면 거의 무한에 수렴되는 상식이 필요하다. 보통의 상식이 아니라, 인터넷에 푹 빠져 사는 폐인들의 상식이다. 이집트를 침공하러 간 롬멜이 스핑크스와 맞상대하는 장면에서는 ‘이지 투 디제이’라는 한물간 음악 게임을 알아야 한다. 바르샤바 시민의 봉기를 촛불소녀가 이끄는 장면은 들라크루아의 그림 을 알고 있어야 한다.

굽시니스트는 전쟁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정말로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 전쟁을 탐구했고, 냉철하고 책임감 있는 주관으로 그 면면을 해설하고 있다. 나는 그를 통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가지고 논 자들의 광기를 새삼 깨닫고 있다. 결국 내게는 쓴웃음이 남는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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