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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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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 놀이 최고봉

등록 2009-10-23 10:46 수정 2020-05-03 04:25
뉴요커 놀이 최고봉. 사진 오정연

뉴요커 놀이 최고봉. 사진 오정연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의 열람실에서/ 모든 영혼은 고요 속에서 과거,/ 혹은 현재, 혹은 미래를 읽어 내려가고 육체는/ 정적 안에 피어나는 상상력에 사로잡힌다.” -리처드 에버하트의 시, ‘열람실,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 중에서

일본에선 니혼진 놀이, 런던에선 런더너 놀이, 뉴욕에선 뉴요커 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리나? 길 한복판에서 지도를 펼치기보다는 미아가 되는 편을 택하고, 여행책자에서 소개한 맛있는 레스토랑 앞에 줄을 서기보다는 허름한 바에서 맥주로 저녁을 때운다. 배고픈 건 알코올로 잊는 거다. 지하철 노선도를 들고 연방 정거장을 확인하기보다는 이어폰 끼고 책을 읽는다. 내릴 역은 언제나 그 전 역이다.

한 달여 뉴요커 놀이에 분주한 나날을 보낸 결과, 그중 가장 강력한 효과를 지닌 것을 알아냈다.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NYPL) 방문’이다. 그렇잖아도 볼 게 넘치는데 웬 도서관? 그러나 42번가와 5번 애비뉴에 위치한 NYPL 메인 건물은 1911년 개관한 이래 보자르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기념품숍까지 갖춘) 명실상부한 관광명소다. 맨해튼을 물바다로 만들고 급기야 꽁꽁 얼려버리는 영화 에서 주인공들이 피난해 책을 태워 몸을 녹이던 곳이라고 하면 좀더 구미가 당길 것이다. 뉴요커의 영원한 롤모델 의 캐리도 여기서 책을 빌리셨더랬다.

입문자 코스. 정문의 늠름한 사자상에서 사진 촬영, 짐 검사를 거친 뒤 입장,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둘러보는 마인드로 어슬렁거리기, 그리고 도서관 뒷마당처럼 자리한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일광욕으로 마무리. 더 여유 있는 중급자 코스는 책상과 의자가 있는 방이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 독서를 하는 것이다. 독서를 하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열람실 안을 두리번거리는 다른 관광객들을 만나면 능숙한 눈인사를 건네자. 대부분의 경우 노트북과 무선 인터넷 사용도 가능하다. 상급자 코스는 도서관 카드 만들기. 거주지 주소가 찍힌 영수증을 들고 메인 빌딩 맞은편 미드 맨해튼 라이브러리를 방문하면 바로 카드를 만들 수 있다. 장기 거주지가 없다면 홈페이지에서 현재 묵고 있는 곳의 주소를 입력하는 절차를 마친 뒤에 방문하면 된다. 여권 등 신분증은 필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카드를 지갑에 넣는 순간 진짜 (‘인텔리전트’한) 뉴요커가 된 기분에 뿌듯해진다. 게다가 바로 책과 DVD 등의 대여도 가능하다.

여느 ○○○ 놀이와 마찬가지로 NYPL 뉴요커 놀이에도 부작용은 있다. 천장의 벽화, 고풍스러운 탁자 위의 고풍스런 스탠드, 창밖으로 보이는 미드 맨해튼 고층 빌딩 사이로 비추는 석양, 고서들로 빼곡한 사면의 책장, 도서관을 가득 메운 왠지 아카데믹한 열기를 번갈아 음미하다 보면 정작 책장은 몇 페이지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몸이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바가지를 쓰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사랑스럽고 경미한 부작용 아닌가. (아 물론, 여러모로 지진아 형편을 벗어날 수 없는 늦깎이 유학생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

오정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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