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민족의 대명절, 추수감사절을 맞이해 어머니와 동생이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왔다. 어리바리하게 세 달 남짓 뉴요커 행세를 했으니, 뉴욕의 멋진 면모를 소개해야 한다는 정체불명의 의무감에 사로잡혀 일주일 전부터 혼자 바빴다. 로버트 드니로가 주인이라는 식당의 저녁 예약, 파이가 맛있다는 동네 베이커리 검색, 언어의 장벽을 느끼지 않을 만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물색 등으로 학업에 지장이 있을 지경이었다. 좁은 원룸에서 세 모녀가 10여 일간 복작거리다 다시 홀로 되어 생각해본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에 열광했던가?
첫 번째, 빨간불에 긴 걸너기. 웬만한 뉴욕 여행책자에도 소개된바, 뉴요커 행세의 첫걸음은 ‘빨간불에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모두 바쁜 걸음으로 차도에 성큼 내려설 때, 정지신호만 바라보던 그들의 팔을 이끌며 길을 건넌 지 며칠. 어느새 어머니는 양쪽을 재바르게 살핀 뒤 여유만만 무단횡단을 즐기고 계셨다. 그러니까 6차선 대로에서 벌건 대낮에 이른바 불법을 저지르는 일탈감 같은 것인데, 어떤 교통경찰도 신호위반 보행자를 붙잡는 일 없으므로 일탈이라고 보기 다소 힘든 건 사실이다.
두 번째, 마트에서 사소하지만 신기한 물건들 구경하기, 혹은 용도 짐작하기. 온갖 종류의 싱싱한 수제 치즈와 소시지, 파스타 면이 즐비한 럭셔리 마트도 좋고, 서울에서는 존재조차 몰랐던 다양한 맛의, 그러나 가격은 서울보다 압도적으로 저렴한 하×다× 아이스크림이 냉동고에 그득한 동네 마트도 좋다. 그중에서도 모녀를 압도했던 장소는 ‘베드, 배스 앤드 비욘드’ ‘컨테이너 스토어’ 등 일종의 생활용품 백화점. 상상 이상으로 다양한 수납용품들, 한참 연구해야 용도를 짐작할 수 있는 주방기구들을 기웃거리다 보면 필요가 발명을 낳는 게 아니라 제품의 존재 자체가 소비를 부르는 것임을, 이것이 바로 소비의 왕국 미국의 진면모임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공원 산책. 뉴요커에게 주어진 거대한 축복과도 같은 센트럴파크를 빼놓을 수 없다. 개와 아이가 잔디밭에서 뒹구는 가족영화 속 한 장면부터 주위 시선은 아랑곳 않고(실제로 아무도 신경 안 쓴다. 우리만 쓴다) 요가에 열중한 멋진 몸매의 여인까지 다양한 볼거리도 있다. 오후 4시만 지나면 어둑해지는 뉴욕의 늦가을이라면, 시내 곳곳 숨겨진 동네 공원 순례도 좋다. 걸어서 10분 거리, 강변에 위치한 집 근처 공원이 그중 압권이었다. 여름이면 영화 상영, 음악회 등 행사가 열리는, 동네 공원치고 제법 실속 있는 그곳에는 마지막 단풍이 한창이었다.
공들여 준비한 이벤트들이 남긴 것은 카드 명세서뿐이고, 막상 이국적인 흥미를 자극한 것들은 지독하게 소소한 일상에 있었다. 여기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냐, 두리번거리며 도시의 첫 얼굴을 눈에 익힐 무렵, 나 역시 남들한테 말하기도 머쓱한 그런 것들에 혼자 열광하곤 했다. 모두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고도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도로교통, 거대한 체인부터 소소한 길거리 마켓까지 극도의 다양성이 보장된 소비환경, 세계 최고의 빌딩 숲에서도 지켜지는, 쾌적한 환경을 가질 권리…. 서울에서 쉽게 맛볼 수 없던 그것들을 거창하게 분석해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어느새 일상 속에 잊었던 그 매력들을 새삼 곱씹고 싶은 심정이다.
오정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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