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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커피숍에서

등록 2010-01-27 16:20 수정 2020-05-03 04:25
반지하 커피숍에서. 오정연

반지하 커피숍에서. 오정연

현지 시각, 2010년 1월17일 일요일 오후 3시10분. 우산에 인색한 뉴요커들도 우산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정도의 음산한 비가 계속 내리고 있다. 이곳은 86번 스트리트와 2번 애비뉴가 만나는 사거리에서 눈을 크게 뜨면 찾을 수 있는 반지하 커피숍 ‘M. 로어스(Rohrs)’. 이런 날씨니 한가하겠지, 라는 한가한 예상을 하고 들어온 이들이 자리를 찾지 못해 발길을 돌리고 있다. 손에는 미리 구입한 커피를 든 채. 맨해튼 주택가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노트북을 켜놓고 혹은 책 한 권 들고 죽칠 수 있는 곳, 그러면서 스타벅스가 아닌 ‘로컬 커피숍’을 일요일 오후에 찾는다면 덜컥 커피부터 사기 전에 발 뻗을 자리를 먼저 물색하는 것이 순서이거늘, 뭘 모르시는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중이다.

3매짜리 조각 원고 하나를 마감하려 해도 집 근처 커피숍을 찾아야 했던 불치병에 서울에서부터 시달렸다. 지구 반대편 맨해튼 한 귀퉁이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고도 병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말이 가까웠을 땐 집구석(그렇다. 서울이든 뉴욕이든 집은 결국 ‘집구석’이 된다)을 벗어나지 않으면 한 줄의 페이퍼도 쓰지 못하는 중병이다. 이 칼럼을 마감해야 하는 격주 일요일 오후마다, 그리고 지난 12월의 수업이 없는 날이면 언제나 노트북을 충전해서 부득부득 집을 나섰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 살던 고향’과 맨해튼은 달랐다. 공짜 무선 인터넷이 인심 좋게 잡히고, 얼굴에 약간 철판만 깔면 커피가 무한 리필이 되며, 노트북 전원을 안방처럼 연결해서 쓸 수 있는 그리운 내 고향이여.

전세계 어디에서나 ‘결론은 스타벅스’인 건 다 이유가 있다. 벤티 사이즈 아메리카노 한 잔은 무한 리필과 같은 효과를 내고,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스타벅스 카드만 있으면 무선 인터넷은 공짜며, 운이 좋아서 전원 근처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노트북 배터리 걱정도 필요 없으니까. 뉴요커들도 죄다 나와 같은 병을 앓아, 그 넓은 스타벅스는 종종 만석이다. (맨해튼 스튜디오의 열악한 환경도 한몫한다는 게 나의 작은 결론이다.) 뉴욕까지 와서 스타벅스 신세라니 왠지 한심했지만 별 도리가 없다며 자위하던 차에 고마운 이웃을 통해 소개받은 곳이 바로 여기다. ‘프렌즈’의 친구들이 죽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정적인 분위기, 스타벅스보다 가격은 저렴하고 맛은 더 좋은 드립식 레귤러 커피, 초콜릿 퍼지 케이크부터 각종 수제 파이와 쿠키, 샌드위치 등 무시무시하게 유혹적인 메뉴가 특징이다. 인터넷과 전원을 사용하려면 일정한 돈을 지급해야 하긴 하지만 작업의 능률을 본의 아니게 올리게 되는 효과도 있다.

‘결론은 현지화, 혹은 로컬 지향’이다. 초심자로 하여금 뉴욕을 제집처럼 편안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사소한 비결로, 만만한 로컬 커피숍에서의 수다 혹은 독서만 한 게 또 있을까. 부록으로 만만한 로컬 음식점에서 일요판과 함께하는 주말의 브런치도 추천할 만하다. 자매편으로는 가장 평범해 보이는 동네 베이글 가게에서, ‘에브리싱 베이글’에 가장 특이해 보이는 치즈를 듬뿍 얹어서 즐기는 점심도 있다. (모든 옵션이 음식과 관계된 것은 철저히 필자의 성향 탓이라죠.)

오정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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