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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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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여름을 식힐 6권의 용의자

섬세한 여성작가 소설부터 경성에 나타난 ‘설홍주’ 탐정까지…
독자들에게 권하는 ‘긴장감 제대로’ 스릴러
등록 2009-07-29 16:23 수정 2020-05-03 04:25

출판이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경향이 강하다 보니 어쩌다가 이 분야를 산업적으로 바라보면 뜻밖에도 무지하게 열악한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무역의 관점으로 보면 출판처럼 무역역조가 심한 분야도 없다. 외국책 번역 수입이 엄청나지만 수출하는 국내 책은 비교가 창피할 정도로 미미하다. 그나마 한국 출판계에서 폄하당하는 실용서나 만화는 외국에서 예전보다 훨씬 약진하는 편인데, 정작 가장 잘난 척하는 문학작품들이 외국에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신의 여름을 식힐 6권의 용의자. 문학동네 제공

당신의 여름을 식힐 6권의 용의자. 문학동네 제공

특히 장르문학 쪽은 무역역조가 더욱 심하다. 외국 작품들은 쏟아져 들어오는데, 국내 작가들의 장르소설은 발견하기조차 힘들다. 읽어주고 싶어도 나오지 않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어쩌다가 나온 작품들이 언론에 소개도 안 되고 비평가들의 평가도 못 받는 현실이다. 장르문학에 무지하면서도 장르문학을 용감하게 무시하는 문학계 권력들의 못되고 무식한 습속 탓이다.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 장르소설들이 국내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과 용기를 주어 앞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작품이 나오는 자극이 되길 바랄 뿐이다.

최근 몇 년새 장르소설 붐이 불면서 올해에도 세계 여러 나라의 스릴러와 미스터리 소설들이 풍성하게 국내에 선보였다. 기본적으로 물 건너 남의 나라까지 올 정도면 자국에서 재미와 대중성을 앞서 평가받은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간혹 배신하는 지뢰들도 있는 법. 국내 독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작품들 중에서 여름철 모처럼 미스터리를 만나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제대로 맛보게 해줄 것들을 골라봤다.

단숨에 이야기의 수렁 속에 푹 빠져보고 싶다면

익숙한 이야기틀은 늘 힘이 세다. (스콧 스미스 지음·비채 펴냄)은 수없이 만나봤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평범한 시민인 주인공 행크는 형 제이콥, 그리고 형의 친구 루와 함께 길을 가다가 우연히 숲 속 깊숙한 곳에 추락한 비행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440만달러가 든 돈가방을 찾는다. 이런 이야기에선 남들에게 비밀로 하고 자기들끼리 나눠갖기로 하는 것이 수순. 세 사람은 남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당분간 기다렸다가 나중에 돈을 나누기로 한다. 하지만 돈을 놓고 갈등이 벌어지는 것이 정석이고, 결국 피가 튀는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의 매력은 군더더기 없는 서술로 단숨에 종말로 치닫는 놀라운 속도감이다. 스릴러의 매력이자 단점이 지나치게 정교하고 수사가 많은 서술이 길게 이어지는 것인데, 이 책은 군더더기가 없다. 이 정도로 술술 잘 읽히는 스릴러는 실로 오랜만이다.

돈에 초연한 듯했던 주인공이 결국 돈의 노예가 되고, 법 없이도 살 것 같았던 인물이 끔찍한 범죄자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한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 범죄자가 돼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나라면 어떻게 일을 처리할까’ 질문하게 된다. 익숙한 줄거리인데도 때론 예상보다 빠르고 강하게, 때론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으로 시종일관 독자를 쥐락펴락하면서 탁월한 결말로 마무리짓는다.

당신의 여름을 식힐 6권의 용의자

당신의 여름을 식힐 6권의 용의자

매력의 종류가 너무 많은 새로운 미스터리를 만나고 싶다면

비카스 스와루프. 현직 인도 외교관이다. 외교관 업무 중에 두 달 동안 소설을 뚝딱 썼다. 퀴즈쇼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무려 32개국 언어로 번역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 영화가 올해 아카데미영화제에서 8관왕에 올랐다. 영화 의 원작을 쓴 바로 그 사람이다. 스와루프를 보면 소설가는 특별하고 타고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만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의 두 번째 소설은 뜻밖에도 미스터리다. 제목은 (문학동네 펴냄). 이 책까지 읽어보고 나면 비카스 스와루프가 왜 독자들을 위해 더 많은 소설을 쓰지 않고 외교관을 계속하고 있나 따지고 싶어진다.

책을 일단 집어보면 무게가 두께로 짐작한 것 이상이다. 625쪽 분량이니 두 권으로 내도 될 것을 한 권으로 낸 것부터 일단 점수를 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풀어내기 시작하는 이야기 분량은 과연 이 책이 600쪽밖에 안 되었나 싶게 푸짐하다. 읽고 나면 거의 소설책 10권 정도를 읽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더욱 감탄하게 되는 것은 이 긴 이야기를 계속 붙잡고 읽게 만드는 이야기 솜씨다.

줄거리는 전형적인 미스터리다. 인도의 악덕 재벌이 파티장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용의자는 6명. 인도 최고 여배우, 전직 고위 관리, 재벌의 아버지인 내무장관, 얼떨결에 파티장에 온 미국 관광객, 마을의 보물을 찾으러 나온 오지 원주민, 그리고 어린 휴대전화 좀도둑까지 6명이 용의자다. 이 각자의 사연이 데카메론처럼 펼쳐지면서 이야기는 쪼개졌다가 다시 미스터리로 합쳐진다.

이 책은 전체 틀을 이루는 미스터리 자체도 재미있지만 용의자 각자의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단편소설들로 따로 떼어 읽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다. 외교관으로서 인도의 현실을 이렇게 통렬하게 비꼬는 점도 정말 놀랍다. 미스터리, 웃음 그리고 환상적인 느낌까지 다양한 감정을 한 권에서 모두 푸짐하게 맛볼 수 있는 특급호텔 뷔페 같은 소설이다.

여성 미스터리 작가들의 강펀치에 아직 제대로 맞아보지 못했다면

미스터리를 자주 읽지 않는 독자는 범죄를 다루는 장르적 특성 때문에 미스터리는 으레 남성 작가들의 영역일 것이라고 추측하기 쉽다. 추리소설의 지존 애거사 크리스티만 떠올려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지적인 여성 법의학자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를 만들어낸 퍼트리샤 콘웰에, 법의학자와 뭐가 그리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법인류학자란 독특한 직종에 뛰어든 여성 주인공 ‘템퍼런스 브레넌’ 시리즈의 캐시 라익스 등을 보라.

여성작가들의 미스터리는 남성작가들에게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새로운 느낌을 안겨준다. 남성작가들의 약점은 남자 등장인물들은 입체적이고 생생한데, 여성 등장인물들이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점이다. 여성작가들은 그 반대여서 남성 캐릭터들은 뻔한 대신 매력적고 생생한 여성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다.

질리언 플린의 (바벨의도서관 펴냄)은 여성 등장인물들끼리의 밀고 당기는 긴장관계와 심리묘사가 일품인 스릴러다. 미국 시골 동네의 묘한 분위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묘사가 마치 예전 인기 미국 드라마 를 보는 듯하다. 고향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을 취재하는 여기자가 살해당한 아이들이 자기 어머니와 관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이야기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가장 상처를 주는 관계인 가족 사이의 애증을 그야말로 극한까지 몰아붙인 소설이다. 끈적끈적한 긴장과 공포, 관능을 잘 섞어 깔끔한 반전에 성공한다.

당신의 여름을 식힐 6권의 용의자. 문학동네 제공

당신의 여름을 식힐 6권의 용의자. 문학동네 제공

리사 가드너의 (시작 펴냄)도 여성작가의 스릴러에 반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지은이 리사 가드너는 원래 경영컨설턴트였는데 정장 차림이 죽도록 싫었고, 항상 다그치는 상사와 직장의 옥죄는 분위기에 늘 괴로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서스펜스 소설가가 되게 했다고 하니 직장을 다니기엔 지나치게 섬세했던 모양이다. 그런 섬세함이 소설 속에선 아주 매혹적으로 펼쳐진다.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될 뻔했다가 살아난 여성 피해자 3명이 ‘생존자 클럽’을 만들어 용의자를 지목한다. 그런데 용의자가 법원에 가는 날 저격수에게 살해당하고 저격수도 바로 살해당한다. 용의자를 죽였다는 의심이 세 여자를 향한다. 무엇보다도 읽는 사람들을 빨아들여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여성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나다. 이 책이 많이 안 팔려 리사 가드너의 책이 덜 소개될까 걱정이다.

또 다른 여성작가 첼시 케인의 (리버스맵 펴냄)는 요즘 웬만한 수사물에선 거의 빠지지 않는 프로파일링의 익숙한 설정을 살짝 뒤집은 스릴러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속에 나오는 미국 연쇄살인범은 프로파일링 분석에서 항상 ‘과거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백인 남성’으로 나온다. 이 책은 그 통념을 깨는 여성 연쇄살인범을 전면에 내세웠다. 의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여성 버전이랄 수 있는 그레첸 로웰은 지금까지 스릴러에 등장했던 연쇄살인범 중 거의 최악의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명을 죽이고 붙잡힌 여성 살인마 그레첸 로웰, 그리고 로웰을 추적하던 수사지휘관이었다가 로웰에게 붙잡혀 거의 해부당하는 고문을 받은 뒤 살아난 형사 아치 셰리단이 주인공이다. 로웰이 검거된 뒤 벌어진 새로운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이야기 속에서 그레첸 로웰과 셰리단 형사의 숨은 이야기가 시간의 역순으로 2중으로 교차하는 내용이다. 그레첸이 셰리단을 집요하게 고문하는 장면 묘사는 끔찍하면서도 독특한 맛이 있다.

고전 탐정소설의 그 전형적인 맛을 새롭게 만나보고 싶다면

셜록 홈스가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서 새로 태어난 설홍주 탐정이다. 한동진씨의 탐정소설 (학산문화사 펴냄)은 런던 베이커가의 명탐정 홈스를 1930년대 경성에서 완벽한 오마주로 되살려냈다. 홈스의 영원한 파트너인 의사 와트슨은 한의사 왕도손으로, 홈스의 하숙집 여주인 허드슨 여사는 조선 아줌마 허도순 여사로 함께 돌아왔다. 법의학 탐정의 원조 손다이크 박사도 손다익 박사로 등장한다. 의자에 앉아 이야기만 듣고도 척척 범인을 찾아내는 홈스의 추리 스타일도 그대로, 권투 실력으로 완력이 대단한 것도 그대로인데 허무하고 탐닉적인 홈스의 기질과는 달리 조선의 설홍주는 완전 모범생 스타일이다.

은 주인공 홈스만이 아니라 홈스 소설의 분위기와 추리 기법까지 실로 꼼꼼하고 철저하게 되살려냈다. 그리고 그 재미 역시 성공적으로 재현해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셜록 홈스의 익숙한 맛에, 패러디한 재미가 주는 새로움을 모두 만족스럽게 만나볼 수 있는 신선하고 상큼한 추리소설이다. 모처럼 나온 한국 추리소설의 기대작이다.

구본준 한겨레 기획취재팀장 blog.hani.co.kr/bon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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