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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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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출한다, 고로 존재한다

노출 심한 케이블TV 프로그램에 나와 스스로 사생활 까발리거나 선정적 장면 보여주는 사람들의 심리
등록 2009-07-24 15:43 수정 2020-05-03 04:25

“100% 실제 상황.” 올리브TV (이하 연애불변)는 진정성 논란을 끝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은 남자친구의 사랑을 의심하는 여자가 남자친구의 진심을 알아보기 위해 찾는 ‘방송 흥신소’다. 의뢰녀가 남자친구의 뒷조사를 맡기면 프로그램은 몰래카메라로 남자의 행적을 기록한다. 남자의 이상향에 가까운 작업녀가 투입된 유혹의 현장에서 그가 얼마나 나쁜 남자인지 보여준다.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작업녀와 남자의 진한 스킨십 장면은 모니터를 지켜보던 의뢰녀와 MC를 기겁하게 만든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본질이 인간이 인간을 구경하는 것이라면 지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노출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쉬운 소재다. QTV <왕관은 내꺼야>의 한 장면.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본질이 인간이 인간을 구경하는 것이라면 지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노출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쉬운 소재다. QTV <왕관은 내꺼야>의 한 장면.

은밀한 애정 행각 날 것 그대로 보여줘

더욱 놀라운 건 처음 보는 남자를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작업녀와 남자를 유혹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는 친구인 도움남. 남자를 속이려고 각자의 역할에 완벽히 몰입해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을 보면 연출이 아닌 리얼이란 사실이 주는 충격이 꽤 크다. 도대체 이들은 왜 낯선 남자에게 입술을 내어주고(작업녀), 친구를 곤경에 빠트리는 걸까(도움남)? 의뢰녀는 왜 방송까지 나와서 남자친구와의 만남을 이어갈지 말지를 정하는 걸까? 우정도, 사랑도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 보니 은 오랫동안 연출 의혹을 받아왔다. 하지만 현장을 지켜봤던 이들은 “사실이라 더 충격적”이란 말로 의혹에 종지부를 찍고, 그 때문에 배가된 선정성을 꼬집는다.

‘막장’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사와 제작진에 대한 지탄을 잠시 접어두면, 가장 흥미로운건 TV 속에서 자신의 은밀한 애정 행각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평범한 젊은이들의 심리다. 이들은 자신의 사생활을 재미로 방송에서 거침없이 폭로한다. 치부일 수 있는 연애·결혼·성(性)에 대한 생각과 행동을 보여주는 일반인 출연자들의 당당한 노출증에 호기심 어린 시청자의 관음증이 덩달아 따라온다. 연예인이 대중에게 사적인 생활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는 딴판이다. 사귄 여자만 200명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남자, 서로에게 손찌검이 일상이라는 커플, 동거남에게 하녀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를 사랑한다는 여자 등이 TV에서 넘쳐난다.

“한 줌의 유명세나 재미 등 가벼운 마음으로 출연”

이렇게 도덕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연애의 현실은 씁쓸하지만 채널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현재 방영 중인 코미디TV (이하 나는 펫)·, 엠넷 , QTV (이하 연애반란) 등은 자신의 사생활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젊은이들의 노출증을 확인하게 한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로 읽히는 매스컴 노출증이다. 코미디TV 기획팀 이소영 차장은 “3~4년 전 라는 짝짓기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할 때만 해도 연예인 지망생들이 출연했지만 요즘은 자신의 사생활을 보여주는 걸 거리끼지 않고 TV에 나오는 걸 즐기는 출연진들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방송에 참여해 재미를 찾는 놀이의 확장이다.

선정적인 스토리를 가진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초창기 출연자들은 연예지망생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방송을 놀이쯤으로 생각하는 일반인 출연자들이 부쩍 늘었다. 3천여 명의 출연 신청자들이 경쟁을 벌였던 <나는 펫>(왼쪽)과 연애 문제 상담을 원하는 이들이 출연하는 <연애불변>(오른쪽).

선정적인 스토리를 가진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초창기 출연자들은 연예지망생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방송을 놀이쯤으로 생각하는 일반인 출연자들이 부쩍 늘었다. 3천여 명의 출연 신청자들이 경쟁을 벌였던 <나는 펫>(왼쪽)과 연애 문제 상담을 원하는 이들이 출연하는 <연애불변>(오른쪽).

선정적인 스토리를 가진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자가 없어 연예인 지망생을 채우던 시절은 옛날이다. 에 출연하는 이들 중에 연예인 지망생은 없다. 연예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을지라도 방송을 연예인이 되기 위한 관문으로 생각하고 출연하는 이들은 줄었다. 의 진짜 커플은 심각한 커플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나온다. 은 연상녀의 ‘펫’을 경험하고 싶은 판타지를 가진 남성 신청자들로 넘친다. 은 ‘스타와 즐기는 일주일의 데이트’를 하려는 여성들이 찾는다. 달콤한 데이트 뒤엔 아이돌 스타의 팬들에게 미니홈피를 테러당하고 인신공격을 받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잠시지만 ‘스타의 연인’이란 특별한 경험에 비중을 둔다. 데이트를 하는 이들의 뒤에서 시청자의 눈을 대신해 관음증적 시선으로 지켜보는 관찰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출연자들은 과감한 스킨십을 나누며 순간을 즐긴다.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는 “한 줌의 유명세나 재미, 자신의 커리어에 보탬이 될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송에 출연해 사적인 애정 행각까지 드러내는 이들은, 없다가 생긴 게 아니라 미디어가 적극적으로 찾아낸 결과”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인기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출연하려는 신청자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방송에서 민얼굴로 자신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노출증은 사실 사이버 공간에서 먼저 이뤄져왔다. 인터넷 미니홈피, 사용자제작콘텐츠(UCC)가 붐을 이룰 수 있었던 건 과시욕인 노출증과 엿보기 심리인 관음증이 잘 맞아떨어져서였다. 인터넷을 끌어안은 TV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인터넷 연예인 ‘얼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는 자신을 과시하는 데 익숙한 10대들의 노출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프로그램이다. 최근에는 한 출연자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오르며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데 효과를 봤다. ‘리틀 강동원’으로 불리는 ‘18살 이태균’이다. 옷차림이나 말투, 생김새만 보면 영락없이 남자인 그는 자신이 ‘정가은’이란 이름의 여자라고 방송에서 밝히면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방송 출연 전에도 인터넷 얼짱 사이트에서 유명인이었던 그는 방송을 통해 자신의 성별 논란을 끝내겠다는 목적을 갖고 출연했다. 인물도 뜨고, 방송도 떴다. 사이버공간에서 노골화됐던, 보여주는 노출증과 지켜보는 관음증이 TV로 옮겨온 전형적인 형태다.

프랑스 국립범죄행동학교 연구원인 올리비에 라작은 이란 저서에서 “TV가 인터넷과 완전히 융화를 끝내게 되면 리얼리티 스펙터클은 급증할 것이고, 관객들은 그 속에 항구적으로 빠져 있게 될 것이며 실제로 배우이자 관객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TV 속 ‘배우’로 참여하는 일반인들이 늘어나면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이해 불가능한 포맷을 쏟아내기도 한다. 옛 애인의 새 연인을 자신이 직접 골라주는 QTV <연애반란>의 한 장면.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TV 속 ‘배우’로 참여하는 일반인들이 늘어나면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이해 불가능한 포맷을 쏟아내기도 한다. 옛 애인의 새 연인을 자신이 직접 골라주는 QTV <연애반란>의 한 장면.

달라진 출연자들의 분위기 때문에 이제 연애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스타성도 필요 없어졌다. 독해질수록 힘을 받는다. ‘플러스’ ‘커플브레이킹’ ‘나쁜 남자’ 등 꼬리표를 바꿔가며 지난 3년간 보여준 의 자극성은 시즌을 더할수록 강도가 세졌다. 이번 시즌에선 감시 대상 남성이 작업녀를 유혹해 모텔에 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제작진이 모텔 안에서 대기하다 작업녀가 데려오는 의뢰녀의 남자친구를 맞이한 적도 있다. 을 연출하는 조상범 PD는 “드러내진 않아도 보고 싶어하는 관음증적 심리를 이용한 프로그램이라 모텔 앞까지 따라가는 선정성의 끝까지 가본 것 같다”고 말했다. 선정성을 극대화하려는 제작진의 의도가 출연자의 노출증과 만나 시청률을 끌어오렸다.

케이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인기를 끌어올린 건 이렇게 8할이 출연자의 몫이지만, 등이 가진 프로그램적 선정성도 무시할 수 없다. 여성들이 주도권을 쥔것처럼 보이는 이들 프로그램은 불평등한 남녀관계와 여성의 성상품화로 화제를 만든다. 여성을 위한 판타지를 제공한다면서 남성의 판타지에 갇혀 있기도 하다. 에서 결과적으로 망신당하는 건 남자지만 상처 입는 쪽은 의뢰녀고, 남성을 유혹하느라 고생하는 건 작업녀다. 도 ‘골드미스’ ‘알파걸’로 통하는 연상녀인 주인이 오히려 펫인 연하남에게 쩔쩔매는 상황들이 자주 벌어진다. 카메라가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훑는 일은 다반사다. 도 진짜 연인이 될 것이냐는 선택이 걸린 휴대전화 번호 교환에서 일반인 여자 출연자와 남자 스타는 차이를 보인다. 능히 예상되는 상황이지만 일반인 여자는 스타와 계속 연락하길 원하고, 연예인 남자는 번호 주기를 망설인다. 관계의 끝, 환상의 종말을 고하는 건 남자란 이야기다.

“시청자의 관음증·성적 판타지 이용” 비판도

여성의 입장이 아닌 남성이 주도하는 판타지, 성상품화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과 은 특히 시청자의 입방아에 여러 번 올랐다. 지난 5월 한국여성민우회는 “전근대적인 남녀관계의 판타지, 여성 신체에 대한 희화화와 경각심 없는 폭력성, 관음증을 유발하는 몰래카메라를 활용하는 제작 행태” 등을 꼬집어 을 ‘이달의 나쁜 방송’으로 뽑기도 했다.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는 “시청자의 관음증과 출연자의 노출증이 만난 막장 연애 리얼리티가 젊은이들의 지극히 가벼운 일부 연애 풍속도를 팔아서 재미를 끌어내는 게 요즘 TV”라고 말한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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