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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빙하기에 ‘구느님’이 납시었다

등록 2009-03-27 15:58 수정 2020-05-03 04:25

아내가 들이닥쳤다. 아니, ‘구느님’( 주인공 구은재를 하느님에 빗대는 말)이 납시었다. 기진맥진한 , 그래도 간판인 ‘웅이 아버지’에 의 장서희가 극중 모습으로 등장했다. 또 어떤 기적을 내리시려나? 이런, 이건 아니잖아. 나는 두 손 모아 얼른 돌아가시라 빌었다. 왜 먼 길 오셔서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날리시고, 필살의 탱고 댄스를 개인기처럼 남발하시나. 원래 있던 곳에서도 충분하시다. 우리를 넘치도록 웃게 만드신다. 은 맥없이 허덕대는 이 시대 개그맨들에게 코미디의 황금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의 계보를 밝히면서 왕년의 막장 드라마들을 들먹이던데, 그로는 부족하다. 이 드라마는 1970~80년대를 뒤흔들었던 온갖 극단의 만화와 드라마 세계를 집대성해놓은 것 같다. 바람둥이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아내는 성형으로 변신해 복수하고, 아내 대신 죽은 여자는 부활해 자기 삶을 훔쳐간 여자에게 달려든다. 출생의 비극, 근친상간, 프로레슬링에 버금가는 난투극, 빨간 페디큐어를 동원한 납량 호러에 이르기까지 이 드라마는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른다. 사실상 전지전능한 판타지다. 그럼에도 그 모든 파노라마가 만들어내는 가장 강력한 효과는 폭소다.
1980년대 초반 짐 에이브러햄스는 데이비드 주커·제리 주커 형제와 함께 로 패러디 영화 붐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들은 ‘패러디’란 단지 수단일 뿐, 자기들 영화에 숨겨둔 진짜 폭소탄은 아니라고 한다. 진짜 웃음의 비법은 다음과 같다. 가능하면 극단적이고 터무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게 하라. 그것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연이어 터지게 하라. 인물은 인물들끼리, 사건은 사건들끼리 꼬이게 하라. 개연성에 굴복하지 말라. 우연은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배우들은 절대 웃지 말 것.
‘막장’이라는 온갖 비난을 받아도 은 꿋꿋하고 진지하다. 그럴수록 서스펜스는 강해진다. 그 괄약근이 단단하게 조인 뒤에 터질 때 나오는 것은 복수의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지만, 내겐 폭소의 카타르시스다.
어느 저녁 이 드라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점 하나만 찍었을 뿐인데 그걸 못 알아본단 말이야?” “이거 왜 이리 빨라? 혹시 지난 시즌을 30분에 요약해서 보여주는 특집 회야?” 그런데 나는 약속 시간도 놓치고 그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뭔가 생각할 여력을 주지 않고 사건은 휘몰아친다. 가 를 물리치고 전성기를 구가했을 때의 포인트, 한 코너 안에 여러 요소들을 뒤섞어 내려치는 연속기. 은 당대의 개그쇼를 능가하는 스피드와 폭발력을 보여준다.
코미디의 황금률은 그것의 사회적 가치, 현실 풍자에 이르러 완성된다. ‘구느님’은 여기에서도 실망을 끼치지 않으신다.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지만 황금이면 다 된다는 걸 보여준다. 은재의 복수 때까지는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지만, 이제 이 드라마에는 권장할 만한 선이 없으니 악과 악이 싸우며 서로를 응징하는 걸 이종격투기처럼 즐기라고 한다. 이제 막장은 진짜 마지막 장을 향해 치달아간다. 마지막엔 어떤 스펙터클로 우리의 웃음을 우주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킬지 기대된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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