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매주 일요일 밤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는 ‘분장실의 강 선생님’이 차지한다. 한국방송 의 새 코너인 ‘분장실의 강 선생님’은 여자 연기자들만 모인 분장실을 배경으로 그들 사이의 복잡한 서열 관계와 살벌하도록 엄격한 규율을 그리고 있다. 중후하고 우아한 대선배 ‘강 선생님’ 역의 강유미를 비롯해 눈치 없는 막내들을 연기하는 정경미와 김경아 역시 ‘국민 요정’이나 ‘미녀 개그우먼’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만큼 독한 분장을 하고 진지한 연기를 펼치지만 이 코너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 두 얼굴의 처세술을 보여주는 안영미다.
“야 똑바로 해, 이것들아~”로 후배들 군기를 잡기 시작해 “야, 나 마키아토 아니면 안 먹는 거 몰라?”라며 까탈 부리는 것은 기본이고 “야, 우리 땐 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봤어 이것들아!”라며 억지 쓰는 것은 애교인 이 ‘진상’ 선배는 한겨울 시집살이처럼 서럽고 고생스러웠던 자신의 신입 시절은 생각도 않고 못된 시어머니처럼 후배들을 잡도리하지만 ‘강 선생님’ 앞에서만큼은 “애들이 연기로 웃길 생각 안 하고 분장으로 웃기려고 하잖아요, 선배니임~”이라며 울먹이는 맘 약한 후배로 변신한다.
게다가 한때 유행했던 “이건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보다 한 수 위인 “우리 땐…” 공격은 ‘나도 이렇게 당하고 살았으니 니들도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 아닌 논리로 무장하고 상대를 옭아맨다. “야, 우리 땐 상상도 못할 일이야. 우리 땐 12시간 내내 공연하고 수돗물 간신히 마셨어. 나 5년차 때, 선배들이 떡볶이 드실 때 간신히 파 한 조각 얻어먹었다!” 아, 여기서 ‘상상도 못할 일’이란 분장실에서 대기 시간에 도너츠 한 입 먹은 것을 뜻한다.
그런데 얼마 전 회사에서 한창 “느이들 므야?” “이거뚜롸~” 따위 안영미 특유의 말투를 따라하며 깔깔대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 창간 초엔 3박4일씩 집에 못 가고 마감하고 그랬어.” “그땐 하루 5시간만 잘 수 있으면 주님의 은총이었어.” 후배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가지라며 내 딴엔 충고랍시고 늘어놓았던 말들에 “야, 이것들아~”만 붙이면 안영미의 억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몇 년이라도 더 산 사람치고 “우리 땐…”을 빼놓고 얘기하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도 한때는 철거민이었다” “나도 한때는 노점상이었다” “나도 학생 때 학생회장 하면서 데모했다” 등 틈만 나면 자신의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로 어필하시는 대통령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고생했다고 해서 사람이 꼭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땐 하루 12시간 차 타고 취재 갔다 와서 새벽에 기사 썼어”라며 잘난 척하던 내가 여전히 상습적으로 마감에 늦는 것처럼, 철거민 출신 대통령 아래서 용산 참사가 일어나고 데모하던 대통령 아래서 ‘상습 시위꾼’을 색출한다며 난리인 걸 보면 말이다.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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