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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전’ 아닌 ‘걸작’을 찾아왔어요

클림트·렘브란트·루벤스·피사로… 밀려드는 블록버스터급 전시회 앞에 선 관객의 선택
등록 2009-02-19 05:02 수정 2020-05-02 19:25
주말에 미술 전시회 가실래요?
<유디트> 클림트전 제공

<유디트> 클림트전 제공



좋아하는 화가 있으세요? 전 클림트를 좋아해요. 황금빛으로 뒤덮인 그림 속에서 유디트가 몽롱한 시선과 약간 벌어진 붉은 입술로 무엇인가에 취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 아시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그림을 보면 유디트가 풀어헤쳐진 왼쪽 가슴 아래로 잘린 털복숭이 머리를 손에 들고 있는게 보이는데요,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죠. 유디트가 자신의 미모와 지혜를 이용해 장군의 머리를 자른 것인데, 어때요? 끔찍한가요? 유디트의 몽환적인 표정이 위험하리만치 유혹적이지 않나요? 요즘 볼 만한 미술 전시회가 많아서 지갑이 가벼워졌어요. 예전에는 전시회를 가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요즘은 구도와 색채를 따져보고 작가가 어떤 느낌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생각하죠. 블로그에 감상평도 올려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던 예전과는 달리 잘 차려진 밥상에서 맛있는 반찬을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해요. 저랑 주말에 미술 전시회 보러 가실래요?

난센스 아닌 센스 문제.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오스트리아 국립 벨베데레 미술관, 러시아 국립 푸시킨 미술관 등을 비행기삯 들이지 않고도 쉽게 구경하는 방법은? 방학 때에 맞춰 국내 국공립 미술관을 찾는 거다. 해외 전시장을 축소해 옮겨놓은 전시회가 사시사철 준비돼 있다. 올봄에도 어김없이 클림트, 렘브란트, 루벤스, 피사로, 마티스까지 서양 미술사를 장식한 거장들의 작품 전시회가 풍성하다. 상업성에 물든 ‘한탕주의 전시’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던 블록버스터급 전시회들이 눈 밝아진 관람객의 문화적 욕망에 맞춰 진화해 미술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25만 명이 찾은 ‘퐁피두센터 특별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자리한 서울시립미술관. 이곳에선 지난 11월부터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화가들의 천국’(이하 퐁피두전)이 열리고 있다. 현재까지 미술관을 방문한 관람객은 약 25만 명. 퐁피두센터는 프랑스 내에서 루브르 박물관과 에펠탑 다음으로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곳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이곳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국내 첫 전시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첫 한국 전시를 위해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부관장인 디디에 오탱제가 기획자로 참여해 피카소·마티스·샤갈 등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대표작 총 79점을 골라왔다. ‘퐁피두전’은 자금과 물량을 총동원해 최대의 관람객을 뽑아내는 블록버스터급 규모에 맞춰 기획됐다. 전시 준비 기간만 4년, 보험료를 포함한 전시 비용이 약 37억원이 들었다.

니콜라 푸생의 은 이번 전시를 안내하는 지도다. 동양의 낙원이 무릉도원이면, 서양의 낙원은 아르카디아. 전시장 입구에는 평온한 세상을 담은 의 그림이 투사된 실크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커튼을 젖히고 만나는 첫 번째 전시물은 프랑수아 사비에르 랄란의 다. 낙원을 주제로 표현한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양떼는 전시의 서막을 알리는 길잡이다. 전시를 기획한 지엔씨미디어의 김현경씨는 “미술사적인 사조나 장르의 구분이 아닌 서양 신화와 철학, 그리고 역사를 아우르는 하나의 큰 주제를 가지고 현대미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한 게 이번 전시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서양미술거장전-렘브란트를 만나다’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렘브란트전 제공

‘서양미술거장전-렘브란트를 만나다’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렘브란트전 제공

‘퐁피두전’에서 전시가 가장 까다로웠던 작품은 호안 미로의 와 다. 국내에서 볼 수 없던 대형 작품들이어서 국내로 운송할 때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높이가 상자까지 포함해 3m가 조금 웃도는 는 비행기로 운반할 수 있는 최대 한계치를 채워 겨우 실어왔다. 문제는 크기만이 아니었다. 캔버스가 넓어 작은 온·습도의 변화에도 민감해 운송 내내 주의가 필요했다. 가로 길이만 6m가 넘는 는 액자에서 분리된 뒤 특수 제작된 실린더 박스에 담겨 국내로 들어와 다시 펼쳐졌다. 작품 설치 과정의 특이성 때문에 퐁피두센터 내 복원 전문가 두 명이 따로 초청돼오기도 했다. 정년퇴직 뒤 미술관을 자주 찾는다는 이형(61)씨는 “퐁피두 전시회 관람이 두 번째”라며 “전시회를 구경하다 모르는 작가들이 있으면 메모해두고 정보를 찾아볼 만큼 미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내용이 좋으면 낯선 화가도 괜찮아

현재 가장 눈에 띄는 전시회는 단연 ‘클림트의 황금빛 비밀-토탈 아트를 찾아서’(이하 클림트전)다. 평생을 사랑이라는 테마로 풍경과 여인을 그려온 클림트는 국내에서도 팬층이 두껍다. 2월2일 시작한 전시는 평일 평균 2천 명, 주말 4천 명 정도의 관람객이 꾸준히 찾고 있다. 대표작인 등 클림트의 작품 110여 점을 공개하는 아시아 최초의 클림트 단독 전시다. 클림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벨베데레 미술관을 비롯해 세계 11개국 20여 개 미술관이 이번 전시를 위해 작품을 대여해줬다.

실제 거래를 하지 않아 그 값을 따지기 어렵다는 미술관 소장 전시품들의 가치는 보험료만으로도 어림짐작할 수 있는데, ‘클림트전’의 보험료는 4조원가량. 억도 모자라 조 단위다. “단 한 점만으로도 전시가 가능하다”고 평가받는 는 오스트리아에서 국보급 보물로 취급되는 만큼 해외 반출 승인이 까다로워 끝내 가져오지 못했다. 벨베데레 미술관이 작품 관리 차원에서 우리나라 전시를 끝으로 향후 10년 안에 클림트 작품을 더 이상 외국에 전시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이번 전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다. ‘클림트전’ 기획사인 문화에이치디 윤영현 이사는 “전시 유치를 하면서 국내 기획사와 일본 기획사들과의 경쟁이 치열했다”며 “‘클림트전’의 국내 유치는 한국 국민의 문화 수준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셈”이라고 말했다. 기획사는 ‘클림트전’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한국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는 외교 모임도 계획 중이다.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전시를 보러오게 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루벤스, 바로크걸작전’에 전시된 <오레이티아를 납치하는 보레아스). 루벤스전 제공

‘루벤스, 바로크걸작전’에 전시된 <오레이티아를 납치하는 보레아스). 루벤스전 제공

‘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전에 전시된 <창밖의 풍경, 에라니쉬르엡트>. 피사로전 제공

‘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전에 전시된 <창밖의 풍경, 에라니쉬르엡트>. 피사로전 제공

이름은 다소 낯설지만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사로를 집중 조명한 전시회도 열리고 있다. 3월25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에서 열리는 ‘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전은 영국 옥스퍼드대 에슈몰린 박물관 소장품 90여 점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은 평가금액으로도 전시 작품 중 최고가인 다. 피사로가 쇠라의 점묘법에 매료되어 그린 그림은 평화롭고 온화한 느낌이 묻어난다. 비 오는 날의 뿌연 느낌을 피사로 특유의 섬세한 붓놀림으로 표현한 은 이번 전시의 메인 이미지로 사용됐다. 평온하고 따뜻한 그림이 많은 ‘피사로와 인상파 화가들’전은 가족 단위 관람객이 40%를 차지한다. 이 때문에 아이와 부모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도슨트 프로그램과 ‘전시작품 따라하기 뚝딱’ 같은 교육 프로그램들의 반응이 좋다.

김홍도와 신윤복처럼 동시대에 살면서 개성이 다른 화풍을 가진 바로크 시대의 대표화가 렘브란트와 루벤스의 전시회도 만날 수 있다. 루벤스의 작품들이 사랑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면, 명암법을 쓰는 렘브란트는 인간의 깊은 상처와 고뇌를 성찰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3월13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루벤스, 바로크 걸작전’(이하 루벤스전)은 바로크 시대 작가 47명의 작품 75점과 루벤스의 작품 19점이 전시 중이다. 현재 12만 명 정도의 관람객이 찾은 서울 전시에 앞서 광주시립미술관에서 5개월간 열린 전시도 10만 명이 관람했다. 루벤스가 그린 는 웅장한 구도와 섬세한 표현이 돋보인다. 평가액은 약 240억원. 루벤스의 대표작인 만큼 이번 전시에서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 그림을 대여해준 오스트리아 비엔나 아카데미 뮤지엄의 요청으로 이번 전시물 중 유일하게 유리관을 덧씌워 전시 중이다.

대표작 다 빠진 ‘이름 장사’는 그만

이번달을 끝으로 전시를 내리는 ‘서양미술거장전-렘브란트를 만나다’(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는 여인의 원숙미를 아름답게 그려낸 렘브란트의 유화 과 기법이 어려워 표현하기 힘든 에칭(동판화) 작품들을 소개한다. 현재까지 25만 명의 관람객이 찾을 만큼 성공했지만 렘브란트의 대표작인 등이 빠져 아쉽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전문 큐레이터가 그림을 설명하는 도슨트 프로그램도 인기다. 전시장마다 관람객에 맞는 다양한 도슨트 프로그램을 준비해 시행 중이다. 퐁피두센터전 제공

전문 큐레이터가 그림을 설명하는 도슨트 프로그램도 인기다. 전시장마다 관람객에 맞는 다양한 도슨트 프로그램을 준비해 시행 중이다. 퐁피두센터전 제공

노골적으로 상업성이 드러난 전시들이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블록버스터급 전시들이 미술의 대중화를 이끌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방학 기간을 이용해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들은 세계적인 명화들을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해외여행이 늘고, 미술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블록버스터급 전시들의 옥석도 가려지고 있다. 교과서에서 본 유명 화가들의 이름만 내세운 ‘제목 장사’ 전시회보다는 입장료가 비싸더라도 내용이 충실한 전시회에 사람들이 몰린다. 국공립 미술관에서는 도슨트 프로그램이나 어린이 아틀리에 등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 지원하며 관람객을 유인하기도 한다. 중학교 2학년인 아들과 함께 ‘루벤스전’ ‘퐁피두전’을 봤다는 직장인 홍선희씨는 “해외에 나갈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까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마련됐으면 한다”면서 “아들과 종종 미술관 나들이를 하는데 어릴 때부터 접한 문화적 경험이 어른이 되어서도 미술을 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사는 “좋은 구성을 가진 전시회가 늘면서 미술에 관심 있는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며 “하지만 해외 큐레이터가 기획하고, 우리나라 기획자들은 보조로 돕는 역할을 하는 전시들도 많아 업계 차원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문 인력 간의 공조와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하반기에는 ‘보테르전’과 ‘프랑스 국립 베르사유 특별전’ 등이 열릴 예정이다. 이제는 유명 작품에 대한 갈증이 사라진 만큼 예술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고민하는 단계로 가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전시기획사인 지엔씨미디어 김현경씨는 “옛날 그림이라 불리는 것들은 ‘잘 그려진 것’을 최고로 생각하면 됐지만, 현대미술 같은 경우 ‘잘 그려진 것’보다는 ‘왜 그려졌는지’ ‘어떻게 그려졌는지’ 등을 읽는 게 중요하다”며 “미술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더욱 절실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영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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