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주로 다루는 매체에서 일하다 보니 가족과 함께 TV를 볼 때 드라마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다. SBS 도 그랬다. “교빈(변우민)이 은재(장서희)를 임신시켜서 결혼을 했는데, 신혼 초부터 은재 친구 애리(김서형)랑 바람이 나서 애까지 있어. 그런데 교빈이가 애리랑 결혼하려고 임신한 은재를 납치해서 억지로 수술을 시키려고 싸우다가 바다에 빠뜨려버려. 그리고 소희(채영인)라는 부잣집 딸이 있는데, 얘는 입양된 오빠 건우(이재황)를 좋아해서 결혼하자고 하다가 안 되니까 바다에 뛰어들어서 자살을 해. 그런데 소희를 찾으러 갔던 건우가 은재를 구해주고, 은재가 죽은 소희 대신 제2의 인생을 살면서 교빈이랑 애리한테 복수를 준비하는 거야.”
40부가 넘는 내용을 30초로 압축한 설명을 경청하던 언니가 한마디 물었다. “그런 얘기가 정말 공중파에 나온다고?” 그러게 말이다. 하지만 불륜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황신혜·유동근의 이 사회적 지탄을 받던 1999년, 억지스런 설정과 특정 직업 비하 등으로 의 임성한 작가 안티 카페가 결성됐던 2002년과 달리 지금은 ‘막장 드라마’의 전성시대다. 최근 종영한 한국방송 이 복잡한 혈연과 백혈병 소재 등으로 진부한 일일 드라마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면 설정과 스토리, 캐릭터가 한층 더 대범하게 억지스러운 과 같은 드라마들은 ‘막장’이라는 장르로 편입된다. 그리고 외도는 기본, 살인미수는 옵션, 생기지도 않은 아이가 유산됐다고 하는 거짓말쯤은 애교에 불과한 이 작품에 대해 최근 시청자는 ‘명품 드라마’라는 애칭을 선사했다.
명품 드라마에서는 이미 죽은 걸로 돼 있는 은재가 건우의 어머니 회사에 가명으로 입사하는 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해 입사 때 필요한 온갖 서류들을 챙기느라 부산을 떨었던 일반인으로선 인사팀의 근무태만이 의심된다. 하지만 명품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책과 테이프로 며칠만 독학하면 중국어와 일본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고, 남편을 피해 숯불 위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다리에 남은 커다란 화상 자국도 “그냥 이것저것 섞어 만든” 파운데이션으로 완벽히 커버할 수 있다. 전세계 화상 환자들을 위해 그 비법 좀 공유하면 좋으련만…. 은재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눈 밑에 점을 찍는 것만으로 완벽한 변신을 이룬다는 설정이 억지스럽다고? 그건 명품 드라마의 세계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사실 ‘막장’이 ‘명품’이라는 역설적 별명을 얻게 된 것은 시청자가 더 이상 ‘막장’에 화낼 기운조차 없어졌음을 보여준다. 아무리 화내고 욕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 현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태도는 지난 1년여간 이 나라에 살면서 우리가 화병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명박산성’에 오르고 ‘닭장차 투어’를 돌며 터득한 비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언젠가 ‘막장 정치’도 ‘명품 정치’로 불리는 날이 올까. 존중할 만한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비웃을 거리들만 늘어나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심심하지는 않지만 역시 슬픈 일이다.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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