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딥시크의 로고. 미국의 온갖 대중 제재 정책을 뚫고 중국 국내파 젊은 개발자들이 이뤄낸 ‘쾌거’는 춘절을 앞둔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국뽕이 차오르는’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발표 시기도 일부러 짜맞추기라도 한 듯이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식날인 2025년 1월20일이었다. 로이터 연합뉴스
잡담 혹은 한담을 할까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너무 꿀꿀하고 우울하기 때문이다. 2024년 연말부터 지금까지 매일 속보로 가득 찬 세상이라 또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자고 일어난 사이 혹은 잠시 컴퓨터나 스마트 기기를 보지 않는 사이에도 어김없이 속보는 쏟아지고 대부분은 멀쩡한 정신으로는 잘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하며 혼자 한탄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저녁이 돼 있다. 그러면 또 다른 속보가 스마트폰 화면 속에 빽빽이 들어차 있다. 다시금 충격과 분노가 엄습해와서 잠자기 직전까지 화를 삭이지 못하다가 애꿎은 아들을 들볶을 때도 있다. 고3 입시생인 아들이 자칭 ‘역덕’(역사 공부를 좋아하는 역사 덕후)이고 장래희망도 ‘근대 이후 세계사’ 연구자인지라 녀석을 붙들고 “도대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가는 것이냐”고 따지듯 묻기도 했다. 그랬더니 아들 녀석의 입에서 아주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확실한 건 이제 엄마 세대는 버려진다는 거야! 어느 책에서 읽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유명한 학자가 그랬어. 세상이 확 변화하는 때에 가장 먼저 버려지는 건 쓸모없는 사람들이래!”
아들 녀석이 ‘유명한 학자’를 들먹이며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진즉부터 내가 조만간 폐기될 유형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속된 말로 이 급변하는 시대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골방 노인 신세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온 건 오십을 넘긴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가뜩이나 ‘테크놀로지’ 분야에 약하고, 입시생을 둔 엄마들이라면 다 아는 ‘스템’(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이라는 용어를 최근에야 겨우 알게 된 나는 요 몇 년 사이 챗지피티를 비롯해 각종 인공지능이 쏟아지면서 거의 멘붕 상태에 빠져 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검색 기능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데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 지능을 초월한다는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가 속속 등장하면서 ‘나의 쓸모’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느끼는 중이다. 이번 춘절(한국 음력설) 연휴 기간, 중국인들의 모임이나 식사 자리에서 가장 많이 오간 대화 주제 중 하나도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가 더 발전하면 “사람들은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되는가”였다.
춘절 ‘국뽕’ 차오르게 한 중국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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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에도 어김없이 춘절이 찾아왔고 삼삼오오 흩어져 있던 친척들이 모였다.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갖가지 한담을 나눴다. 매년 등장하는 단골 화제는 자식들의 학업과 진로, 결혼 문제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였다. 올해 춘절에는 한 가지가 더 늘었다. 딥시크와 ‘춤추는 로봇’ 휴머노이드다.
인공지능 개발에 필수적인 반도체 수출 제재 등 미국의 온갖 대중 제재 정책을 뚫고 중국 국내파 젊은 개발자들이 이뤄낸 ‘쾌거’는 춘절을 앞둔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국뽕이 차오르는’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발표 시기도 일부러 짜맞추기라도 한 듯이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식날인 1월20일이었다. “미국 너 어디 한번 엿먹어봐”라는 듯이 말이다.
여기에 더해 춘절 기간 방영된 ‘춘완’(春晚·음력설 전야에 방송되는 종합오락프로그램)에 등장한 ‘춤추는 로봇’은 딥시크에 이어 중국인들의 온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빨간 설빔을 입은 16대의 휴머노이드가 ‘다마’(아줌마)들과 함께 중국 전통 춤인 ‘뉴양거’를 리듬에 맞춰 마치 아이돌 댄서들처럼 칼군무를 췄다. 딥시크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사람인 양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부채를 공중으로 던지고 받는 고난도의 춤까지 추는 휴머노이드에 사람의 피부만 갖다 붙이면 진짜 사람이 추는 춤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 휴머노이드는 중국 안팎의 언론으로부터 단순히 로봇이 추는 것 같은 기계적인 움직임을 넘어 중국 전통 춤의 정수를 완벽하게 재현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 칼군무를 춘 휴머노이드 역시 외국자본과 기술이 아니라 ‘유니트리’라는 중국 내 기술과 자본으로 만들어진 로봇기업이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가성비 인공지능으로 알려진 딥시크에 이어 ‘춘완’에서 춤추는 휴머노이드까지 직접 눈으로 보게 된 중국 친척들은 “세상이 확 뒤바뀌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이제 비싼 돈 들여서 국외 유학 갈 필요 없고 중국에서 열심히 공부해도 세계 최고의 인재가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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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척이 고3 입시생인 아들에게 물었다. “넌 전공을 뭘 할 생각이니?” 잠시 우물쭈물하던 아들이 다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사학과에 가려고요.” 그러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문과 멸망 시대에 문과 학과를 간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전망이 안 보이는’ 역사학과를 가겠다고 하니 다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학을 가지는 못했어도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서 떵떵거리고 사는 한 친척이 답답하다는 듯이 아들에게 말했다. “역사학과 나와서 너 어떻게 먹고살려고 하니? 진로상담으로 유명한 일타 강사 장쉐펑 선생도 말했잖니. 꿈을 좇는 것은 중요하지만 꿈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고.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던 거 같은데. 전공을 택할 때는 자신의 적성도 고려해야 하지만 사회적인 (구직) 현실과 수요, 미래 전망도 고려해야 한다고. 역사학은 그냥 취미로 공부해도 되니까 취직 잘되는 학과로 방향을 돌리렴. 인공지능 시대가 왔으니 역사학이나 다른 전망 없는 문과 학문은 이제 사라지거나 버려질 거야. 잘 생각해라. 앞으로는 배달원도 휴머노이드가 하게 될지도 모르는 세상이 온다고.”
아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이며 듣기만 했다. 그 돈 많은 친척 아저씨는 마지막 일침을 가하듯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확 바뀌는 인공지능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자’(哪吒) 만화영화에 나오는 투바수(土拔鼠·두더지와 비슷하게 생긴 다람쥐과에 속하는 동물)처럼 살게 될 거야!”

2025년 2월10일 중국 베이징의 한 영화관에서 화면에 ‘너자 2’의 캐릭터가 표시돼 있다. ‘너자 2’는 개봉 첫 10일 동안 10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뒤 중국 박스오피스 신기록을 세웠다. EPA 연합뉴스
1억 관객 영화 속 실감 나는 노예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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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춘절 연휴 기간에 중국인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끈 화제가 하나 더 있다. 만화영화 ‘너자 2’(哪吒之魔童闹海·마술소년 너자의 바다소동)다. 이 영화는 춘절 연휴 대목을 노리고 1월29일 개봉한 이후 불과 일주일 만에 관객 수 1억 명을 돌파했다. 중국 역대 개봉 영화 중 최다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 ‘역사적인’ 영화다. 지금까지 중국 영화사상 최고 흥행을 기록한 작품은 2021년 개봉된 천카이거 감독의 ‘장진호’(长津湖)였다. ‘장진호’는 누적 흥행 수익이 57억위안(약 1조원)을 넘어선 초대형 흥행작이었는데, 이번 춘절에 ‘너자 2’가 개봉 9일 만에 이를 훌쩍 넘어섰다.
이 영화 역시 딥시크나 춤추는 휴머노이드 로봇처럼 국내 기술로만 제작됐다는 점에서 중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중국 전통 신화와 현대적인 스토리텔링이 결합한 이 영화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전 연령층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중-미 관계를 암시하거나 은유하는 내용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많아서 보는 재미를 배가시키고 있다. 이 영화는 2019년 개봉한 ‘너자 1’(哪吒: 魔童降世·마술소년의 강림)의 후속작이다. 2019년 첫 편이 개봉됐을 당시에도 중국 애니 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고, 그해 최고의 흥행작이었다. ‘너자’는 원래 중국 고전소설 ‘봉신연의’(封神演义)에 나오는 영웅적 존재로 알려져 있고, 도교와 민간신앙 등 신화와 전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중요 인물이라고 한다. 신화나 전설 속 너자는 용감하고 정의로운 한편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반항적 영웅이다. 영화에서 너자는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해온 천상계의 폭력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자신의 친구 아오빙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젊은 영웅으로 묘사된다.(자세한 줄거리를 알고 싶으면 딥시크에 물어보라.)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요? 나는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억지로 해야만 한다고요? 그게 운명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규칙이요? 그건 깨기 위한 것이죠! 내 운명은 내 것이지 하늘이 정해준 것이 아닙니다.”

‘너자 2’의 한 장면. 중국 인라이트미디어 누리집 갈무리
이 영화가 큰 인기를 끈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명대사’들처럼 세상의 정해진 질서와 규칙을 거부하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괴물 소년’ 너자의 캐릭터 덕분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 운명의 장난으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괴물 같은 마력을 갖고 태어나 세상의 온갖 차별과 냉대를 받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마력을 ‘선한 힘’으로 바꿔서 독재자가 지배하는 천상계를 파괴해가는 너자의 모습에 수많은 사람이 자신과 중국의 처지에 감정이입을 하며 공감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는 ‘투바수’라고 불리는 두더지처럼 생긴 동물들이다. 투바수들은 다 해진 낡은 옷을 입고 온종일 노예처럼 힘든 노동을 하다가 정해진 시간에 딱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맛없고 비위생적인) 호박죽을 받아먹으며 사는, 지상의 가장 낮은 계층 사람들을 은유하는 캐릭터다. 그들은 너자가 천상계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자신들의 마을로 내려와서 먹던 밥그릇을 가로채고 “너희들을 잡으러 왔다”고 해도 놀라서 달아나거나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미련하고 답답한 존재다. 자신들의 누추한 밥그릇을 뺏으려 하는 너자를 향해 오히려 “아직 배부르게 먹지 못했다”며 밥그릇에 다시 얼굴을 묻고 먹기에만 전념한다.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천상계의 독재자 우량셴웡(无量仙翁)이 너자를 시켜 그들을 토벌하라고 한 이유는 아무리 힘없고 바보 같은 투바수일지라도 수가 많고 뭉치면 자신의 권력을 위태롭게 할 위협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처럼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투바수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지금도 대도시 어느 외진 곳에서 눈에 띄지 않는 누추한 복장을 하고 가난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고된 노동을 하고 있다. ‘세상을 확 변화시키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에 그들은 ‘춤추는 로봇’만큼도 관심을 못 받고 있다.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시대를 살다
지난 2월7일치 싱가포르 ‘연합조보’에는 상하이 외곽에 있는 일용노동자들에 관한 르포 기사가 실렸다. 온 세계가 중국의 독자 기술로 개발한 가성비 인공지능 딥시크와 휴머노이드로 인한 충격과 흥분에 휩싸여 있을 때라 그 기사는 별다른 시선을 끌지 못했다. 중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인 상하이의 한구석에서 매일 새벽 일용직을 구하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은 옛날처럼 못 배우거나 나이 든 중장년의 가난한 농촌 출신들이 아니었다. 경제침체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대졸 청년들과 역시 일자리 구하기에 실패한 45살 이하의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시간당 22~25위안(약 4천~5천원)의 시급을 받으며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돈만 벌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일자리가 없어서 허탕 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너자 2’에 나오는 현실판 투바수들이다.
그 기사를 읽으며 생각했다. 그들도 세상이 확 변하는 시기에 나처럼 가장 먼저 버려지는 사람들인 걸까.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고 휴머노이드가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가 왔는데 ‘우리들’은 대체 무엇을 해서 가난한 밥그릇이라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이래저래 걱정이 많아진 설 연휴였다. 전망 없는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아들의 미래도 걱정이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걱정은 한국 도처에 출몰하고 있다는 ‘중국 간첩들’이다. 그 많은 중국 간첩은 그동안 어디 숨어 있다가 갑자기 대규모로 나타나 한국 사회를 교란시키는 것일까. ‘너자’를 보내서 일망타진하라고 건의해야 하나. 아!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딥시크에 물어봐야 하나.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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