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날, 시댁으로 내려갈 기차표를 발권하고 남은 한 시간 동안, 역과 이어진 대형서점을 찾았다. 이럴 땐 미뤄뒀던 책을 읽는 게 제격이다 싶어, 할레드 호세이니의 와 을 골랐다. 갈 때 한 권, 올 때 한 권 읽으면 되겠군 하면서. 물론 550페이지가 넘는 책을 광주로 가는 두 시간 40분 만에 다 읽는 건 무리였고, 고마우신 시어머니 덕분에 차례를 지내고 설거지를 마친 뒤로 앉아서 내리 두 권을 다 읽었다. 머리가 묵직했다. 10년 전쯤 읽었더라면 펑펑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물 대신 이런저런 장면들이 떠올랐다.
장면 하나. 1980년대 초반, 나는 유머난을 보려고 간혹 를 얻어 읽곤 했는데, 당시에 자주 실리던 기사 중 하나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에 맞선 무자헤딘(이슬람 무장세력)들의 무용담이었다. 물론 냉전체제가 막을 내리기 전이었으므로, 미국은 당연히 무자헤딘의 편을 들었고(사실 그냥 편을 든 게 아니라 중앙정보국〈CIA〉는 그들에게 달러와 무기를 제공했다), 우익 계열인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용감무쌍한 무자헤딘의 산악 게릴라들이 미국이 지원한 스팅어미사일로 러시아 헬기들을 어떻게 격추시켰나를 생생하게 다루었다.
장면 둘. 2001년 3월. 무자헤딘으로부터 파생된 군벌 중 하나인 탈레반이 로켓포와 탱크로 바미안 지역에 남아 있던 세계 최대의 53m짜리 석불을 파괴했다(이 불상에 관한 이야기는 에도 꽤 자세히 등장한다). 탈레반은 그들을 합법정부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며 3년 동안 석불을 흥정거리로 내밀었으나, 유엔의 봉쇄정책이 펼쳐지자 9·11에 맞먹는 스펙터클을 연출하며 불상을 파괴했고, 국제사회로부터는 어마어마한 비난이 쏟아졌다.
장면 셋.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 23명이 잔여 탈레반 세력에 의해 납치되고, 두 사람이 사망했다. 이라크에서 사망한 김선일씨 때와는 달리, 피랍자들에게 오히려 비난의 여론이 쏟아졌다. 탈레반에 대한 비난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저 세 장면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시대별로 꽤나 달랐다. 첫 번째 시기에 아프간인들은 당연히 영웅이었다. 그때 그들은 소련의 적화야욕에 맞선 용감한 전사들이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조직된 탈레반이 반미로 돌아서고, 9·11과 저 석불 사건이 터진 이후로는 모두들 아프간과 중동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리고 마지막 사건에서는, 물론 한국 개신교에 대한 혐오가 더 컸기 때문이겠지만, 한국인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습을 존중했어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만약 할레드 호세이니의 이런 책이 2000년대 후반인 지금이 아니라 훨씬 전에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1980년대에 나왔더라면 공산정권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자유의 땅 미국을 찾아 탈출한 서바이벌 스토리가 되었을 것이고, 90년대에 나왔다면 피를 부르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지하드를 경계하는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비교적 최근에 나온 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대부분의 전쟁, 특히나 아프가니스탄처럼 복잡한 현대사를 지닌 나라의 전쟁은 그 책임을 어느 한쪽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또한 전쟁의 슬픔과 휴머니즘을 다룬 이야기의 이면에는 늘 또 다른 스토리가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홀로코스트 장사’라는 비판이 따르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 두 권의 책은 비교적 오해의 소지가 적다.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이 와 〈CNN〉의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먼지 날리는 내전국이 아니라 시와 사랑과 아름다움이 살아숨쉬는 나라이며,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민초들, 그중에서도 늘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되는 여성과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질곡 어린 역사를 면밀히 담아내고 있다. 물론 2001년 이후 발생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 부분도 훗날 작가의 다른 작품을 통해 기대해볼 만하다.
제3세계 이야기를 그린 책으로는 정말 보기 드물게, 이 책들이 국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곰곰이 생각해봄직하다. 외국 문학, 그중에서도 제3세계의 휴먼 스토리를 읽을 때, 눈물어린 카타르시스 외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는가. 그리고 자신이 흘린 눈물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에선 또 무엇이 필요할까.
p.s. 인터넷에서 자료를 확인하다가 놀라운 기사를 읽었다. 바미안의 불상이 파괴되기 전, 바미안 지역의 아프간 소수민족인 하자라 족의 최고지도자가 석불의 보호를 위해 국제 사회, 특히 그중에서도 한국의 도움을 절실하게 요청했다는 사실이었다. 몽골계임을 자처해온 하자라 족은 터키가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듯, 예전부터 우리에게 친근감을 표해왔다고 한다. 물론 아무런 회답도 얻지 못했지만.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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