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애거사 크리스티·엘리스 피터스 ‘황금의 계보’를 잇는 P. D. 제임스의 고독을 눈여겨보라</font>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최근 미국의 물량 공세에 밀리고는 있지만, 영국은 여전히 미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근사한 추리소설들이 쏟아지는 나라다. 코넌 도일이 확립한 전통 아래,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이 그 황금의 계보를 이어왔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애거사 크리스티를 위시한 여성 작가들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대변한 도로시 세이어스, 현대적 감각을 지닌 미넷 월터스, ‘캐드펠 시리즈’의 엘리스 피터스, 빅토리아 시대에 안착한 앤 페리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 중에서도 P. D. 제임스는 특별히 방점을 찍어 소개하고 싶은 작가다.
건조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문체만큼이나 남성적인 그녀의 이름은 사실 이니셜을 펼치면 여성적이기 이를 데 없는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 미국과 영국 추리작가협회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그녀에게 ‘마스터’ 칭호를 바쳤고, 영국 왕실에서도 훈작사 및 남작 작위를 수여한, 그야말로 현대 영국 추리소설의 대변자다.
P. D. 제임스의 올터 에고인 ‘아담 달글리시 총경’은 콜린 덱스터의 ‘모스 경감’과 함께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형사 캐릭터일 텐데, 특이하게 그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낭만적인 캐릭터를 떠올리면 큰 오해. 예의 바르고 냉정한 현대풍 영국신사의 전형인 그는 총명하고 칼 같은 성격에, ‘제인 오스틴에 열광하는 여자들이 보기에’ 키 크고 거무스름하며 핸섬하기까지 하다.
또한 그는 거리두기의 명수다. 이젠 추리소설 팬들에게도 제법 익숙한 용어일 스코틀랜드 야드(런던 경시청)에 근무하는 달글리시 총경은 출세욕에 불타는 상관이나 총명한 여자 부하직원, 살인 용의자인 거만한 귀족이나 비루한 부랑자에게도 똑같이 냉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한다. 그의 눈에 비친 20세기 후반의 영국 사회는 계급과 빈부차, 성적 혼란으로 가득한 욕망과 소외의 사회다. 자기과시욕에 시달리는 용의자들과 증인들은 그의 앞에서 마치 고해라도 하듯 앞다투어 떠벌리고, 뒤돌아서서는 심리적 숙취와 두려움에 시달린다.
미국식 스릴러에 비하면 턱없이 느리게 느껴질 법도 한 영국식의 꼼꼼하고 느린 ‘실시간’ 수사과정을 통해 달글리시는 각양각층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유죄 여부를 떠나 그들의 고백에서 깊은 외로움과 고독을 읽어낸다.
이런 달글리시가 유일하게 따뜻한 눈으로 지켜본 캐릭터는 그와 스쳐지나간 인연인 젊은 여탐정 코딜리아 그레이다. 고아이자 무일푼이지만 정직하고 올바른 상식을 지닌, 정말로 의 셋째딸을 연상시키는 코딜리아는 ‘달글리시 시리즈’와는 별도의 시리즈인 ‘코딜리아 그레이 시리즈’를 이끌고 있다. 달글리시 시리즈가 지금까지 열네 권가량 출간된 것에 비해 코딜리아 그레이 시리즈는 두 권밖에 나오지 않아 아쉽다.
직업적 특권을 누리는 당당한 달글리시와 달리, 코딜리아는 파트너의 자살 뒤, 탐정사무소를 홀로 떠맡아 운영하면서 하는 일마다 ‘맨땅에 헤딩’이다. 대개의 영화 속 여탐정이나 여형사 캐릭터들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현실과 동떨어진 활약을 펼치는 반면, 코딜리아 그레이는 ‘아무 배경 없이 직업세계에 뛰어든 젊은 여성이 부딪히게 되는 상황’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맥락 안에서 사건을 돌파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는 뜻의 원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얼마 전 황금가지에서 펴낸 재출간작은 라는 아쉬운 제목을 달고 나왔다.
달글리시 시리즈는 대부분 품절이기는 하지만, 일신문화사에서 등이 나왔고, 행림출판사에서는 을 펴냈다. 코딜리아 시리즈인 역시 일신문화사판으로 구할 수 있다. 달글리시와 코딜리아의 만남은 에서 처음 이루어지는데,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이 앞으로 맺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일랑 접는 게 좋다. P. D. 제임스의 소설은 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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