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릿의 진정성 운운하는 심사평들…책도 팔아먹고 권위도 챙기려는 안쓰러운 몸짓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아가씨 문학’이라는 뜻의 ‘칙릿’(Chick-lit)이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강 그 원조 격인 작품이 헬렌 필딩의 라는 데는 다들 별 이견이 없을 터다. ‘보통 여자의 왕자님 찾기’라는 테마의 영원한 고전인 제인 오스틴의 을 1990년대 영국식으로 변주한 이 작품은 때마침 원작의 영화화와 〈BBC〉의 드라마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심지어 두 작품의 남자 주인공이 같은 배우였다) 전세계적 메가 히트작이 되었다.
칙릿이 한국에 최초로 상륙한 것은 물론 한국어판이 나온 1999년이라고 해야겠지만, 장르의 발판을 다진 것은 책이 아니라 유행의 첨병인 방송 ‘온 스따일~’과 패션잡지들이었다. 그들이 심어준 뉴욕식 삶과 할리우드 스타, 명품 브랜드의 이미지 홍수에서 촉발된 욕망 덕분에, 미국 현지와 3년이라는 적절한 시간차를 두고 소개된 는 그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등 수많은 작품이 번역돼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올해, 한국 문단에서 세계문학상, 오늘의 작가상, 창비장편소설상을 휩쓴 작품들은 모두 한국형 칙릿이다.
이홍의 , 백영옥의 , 서유미의 이 바로 그들로, 최근까지 어디에 속할지 애매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정이현의 같은 소설들까지도 이제는 그 범주 안에 사뿐히 안착하는 분위기다.
이제 문학출판사들은 예로부터 소설의 주소비층이었던 20, 30대 여성 독자들을 노골적으로 공략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에는 여전히 애매한 구석이 있다. ‘칙릿’으로 많이 팔고는 싶으나, 지금까지 정통 문학을 펴내면서 쌓아온 ‘문단의 권위’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중앙 일간지 출판면에는 ‘문단의 젊은 피’ 정도로 어필한다. 그러면서도 어디선가 ‘칙릿’이라는 딱지를 붙여주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조용히 따라간다.
이런 어중간한 노선은 책의 포장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이들 소설의 추천사나 심사평들은 둔하고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다. 최근 가장 잘 팔리는 은 그나마 태생부터 ‘칙릿’임을 전면에 내세운 마케팅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역시 뒤표지에는 “진정성을 지켜가려는 젊은이들을 자기 세대로 끌어안기를 전혀 피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뽑았다고 엄숙히 말씀하시는 심사위원 아홉 분의 심사평을 실었다. 과연 1억원이라는 상금이 그 때문에 주어졌을까? 그리고 독자들이 그걸 위해 이 책을 샀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칙릿은 무엇보다도 ‘욕망’의 소설이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일찍이 할리퀸 로맨스, 혹은 귀여니 소설 등을 통해 사랑과 연애, 신분상승과 관계맺기의 욕망을 둘러싼 내러티브에 단련되어온 독자들은 그보다 훨씬 영리하다. 사보는 이들은 즉각 안다. 이 책이 그들이 찾는 바로 그 책인지 아닌지.
칙릿의 존재 이유를 ‘진정성’에서 찾는, 과연 있기나 할까 싶은 극소수의 희귀한 독자들에게 어필할 요량이 아니라면, 칙릿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한 기성작가나 평론가로부터 작품과 동떨어진 서평이나 추천사를 받아내려고 땀 흘릴 시간에 차라리 새끈한 카피 한 줄에 목숨을 걸거나, 뛰어난 표지 삽화가를 찾아 헤매거나, 혹은 미국식 에디터십을 발휘해 작가와 함께 원고를 감각적으로 뜯어고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일 터다. ‘팔고 싶다는’ 솔직한 욕망은 ‘사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니.
어쨌든 이런 문제와 관련해 출판사들보다도 더 느린 곳이 있다면, 바로 국립국어원이다. 얼마 전 그들이 칙릿의 대안으로 제시한 ‘꽃띠문학’이라는 예쁜 단어는, 이명박 정부의 ‘아륀지’ 소동과는 다른 맥락에서 살짝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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