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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든 뭐든, 두 작가를 추억함

등록 2008-06-05 00:00 수정 2020-05-03 04:25

메이지 시대 작가 히구치 이치요와 쇼와 시대 작가 하야시 후미코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언제부터인가 여성작가에게 ‘여류’라는 말을 붙이면 덜 배운 취급을 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나마 여류라는 유쾌하지 않은 말을 떼어낸 것으로도 고맙다 해야 할까 싶지만, 작가 앞에 굳이 ‘여성’이라는 말을 붙이는 관행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여성작가들이 ‘여류’로 불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던 옛 시절의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작가가 있다. 한 사람은 2004년부터 여성 최초로 일본 화폐에 등장한 메이지 시대 작가 히구치 이치요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다이쇼·쇼와 시대의 작가 하야시 후미코다.

히구치 이치요는 우리로 치면 황순원의 에 해당될 ‘국민 단편소설’ 를 쓴 작가로, 수많은 시와 단편소설을 남기고 24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는 아직 봉건적 분위기가 살아 있는 유곽 마을을 배경으로 기녀가 될 여자아이와 스님이 될 남자아이의 어렴풋한 풋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인기 높은 게이샤 언니를 둔 말괄량이 소녀 미도리와 어딘가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대처승의 아들 신뇨. 소꿉동무인 두 아이는, 미도리가 초경을 시작해 본격적으로 기녀 수업을 받게 되고, 신뇨 역시 스님 공부를 시작하면서 서로 다른 세상, 다른 질서에 속하는 사람이 되어 쓸쓸히 헤어진다.

사라진 일본의 옛 서정을 담아낸 를 비롯해 등의 걸작은 이치요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전 약 1년 반 동안 쏟아져나왔는데, 이 기간을 일본에서는 지금도 ‘기적의 14개월’이라 부른다. 이치요의 일기와 단편들은 북스토리에서 세 권으로 묶어 펴냈고, 생각의나무에서는 로, 제이앤씨에서는 으로 나왔다.

메이지 시대를 뒤이은 다이쇼·쇼와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하야시 후미코도 간난신고라면 이치요에 뒤지지 않는다. 역시 젊어서 너무 고생한 탓에 한창 글을 쓸 나이인 48살에 사망했다. 사생아로 태어난 후미코는 부모와 함께 행상을 하며 전국을 떠돌았고, 19살 때부터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러면서 화가나 시인과 동거했는데, 이런 생활을 통해 산전수전을 다 겪게 된 후미코는 금전관계나 남녀관계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견지한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게 된다. 아마도 ‘아시아에서 (가난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관해 하야시 후미코만큼 사실적이고 생생한 소설을 써낼 작가는 달리 없으리라. 그는 여관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몽당연필을 혀로 핥아가며 일기체로 쓴 소설 로 최초의 성공을 거둔다. 이 자전적 소설에는 “남자의 돈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진흙을 씹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다”라는 유명한 대목이 등장한다.

이후로 여성의 자립과 가족, 사회 문제에 천착한 등의 작품을 연달아 내놓았는데, 대부분의 작품이 일본 흑백영화의 거장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원작자 하야시 후미코와 나루세 미키오 감독, 그리고 탁월한 여배우 다카미네 히데코 삼인조가 만들어낸 여섯 편의 영화는 일본 영화계에 길이길이 남을 걸작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은 오즈 야스지로의 에 이어 일본 영화 역대 베스트 100 중 2위에 오르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직후, 동남아에서 돌아온 불륜 남녀의 처절하고도 쓸쓸한 사연을 담은 이 작품은 ‘꽃의 생명은 짧고 괴로운 나날만 많으니’라는, 자작 하이쿠에 실린 후미코의 인생관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후미코의 두 대표작 와 은 소화출판사와 어문학사에서 출간됐다. 이런 책은 절판되기 전에 사두는 게 돈 버는 길이다.

두 작가 모두, 여류든 뭐든 간에 독립된 인간으로 글을 쓰며 살아가는 것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이들이다. 이런 장인들을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이랴.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장미는 장미라 부르지 않아도” 여전히 향기로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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