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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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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도 무녀들이 필요하다

등록 2008-02-15 00:00 수정 2020-05-03 04:25

새롭게 신화 해석하기, ‘세계신화총서’의 와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도 있고, 그래서인지 고전과 신화는 여러 예술 장르 안에서 무수히 다시 태어난다. 이 과정에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수행자의 해석이다. 우선 해석이 가장 큰 차이를 가져오는 장르로는 원곡의 재현을 장르의 기반으로 삼다시피 한 클래식 음악이 있다. 그리고 고전 희곡의 재생률이 높은 연극이 그 다음쯤이다. 원작을 영화화하는 경우에는 몇 가지 리메이크가 나오기도 하지만, 대개 새로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아무래도 연극보다는 해석의 차이를 발견하는 재미가 덜하다. 새로운 이야기, 또는 새로운 이야기 방식을 늘 고민의 원천으로 삼는 소설 역시 여기서는 대개 비껴간다.

하지만 문학에서도 이따금 고전이나 설화의 모티브나 내용을 ‘다시 쓰기’ 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지는데, 지난해의 베스트셀러였던 황석영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세계신화총서’ 역시 고전 텍스트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다시 쓰게 하는 영국 캐넌게이트 출판사의 프로젝트다(한국판 문학동네 펴냄). 뭐니뭐니 해도 이 시리즈의 백미는 헤라클레스와 아틀라스 이야기를 그린 영국 소설가 재닛 윈터슨의 와 구약성서 속 삼손의 이야기를 묵직하게 풀어낸 이스라엘 작가 데이비드 그로스먼의 이다.

는 헤라의 미움을 사서 평생을 떠돌며 욕망과 숙명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다혈질 헤라클레스와 그에게 속아넘어간 우직한 아틀라스의 이야기다. 헤라클레스는 그 드라마틱한 운명과 광기 덕분에 신화 속에서도 빛나는 존재지만, 재닛 윈터슨은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구를 짊어진 채 잊혀진 고독한 아틀라스에게 주목한다. 아틀라스에게 그 ‘무게’를 감히 내려놓게 한 것은, 신화의 시대가 지나고 외계를 탐사하는 인간의 시대에 우주로 쏘아올려진 러시아 우주선 미르호에 홀로 탑승한 실험용 개 라이카다. 결박당한 거인과 그에게 자유를 꿈꾸게 한 개 한 마리의 교감. 우주적 테마가 그 소박한 한 점의 사랑 이야기로 수렴되는 순간의 뭉클함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은 구약성서의 깊고 깊은 행간을 낱낱이 탐사한다. 삼손의 어머니는 천사에게 자신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는 곳마다 무수한 핏자국을 남겼던 이 장사(壯士), 세실 B. 데밀의 영화 속에 묘사된 그의 모습은 어쩌면 람보나 터미네이터 같은 할리우드 영화 속 마초 사내들의 원형이라 볼 수도 있다. 세대를 거듭하고,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이들은 끝없이 많지만, 누구도 삼손의 이같이 단순한 신화적 외연 안에 깃든 욕망과 갈등을 꼼꼼하고 깊게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그로스먼은 유대 전통 안에서 화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서도, 그의 침묵과 행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숙명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다 간 가여운 사람, 자신의 부모에게조차 낯선 존재로 태어난 아이, 평생 사랑받기를 갈구했으나 끝내 누구에게서도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한 고독한 사내의 내면을 되살려낸다.

이렇듯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옛 이야기들의 외연에서 낯섦을, 그리고 다시 한 번 깊은 성찰을 얻게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다시 쓰기는 의미를 지닌다. 재닛 윈터슨은 겸손하게도, “내 작품은 커버 버전(대중음악의 원곡을 다른 가수가 부른 것)으로 가득하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신화와 고전의 시대에서 너무나 멀어진 우리에게는 다시 한 번 그들의 신탁을 해설해줄 무녀가, 그들의 친절한 목소리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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