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취향의 개척자라 불릴 만한 선배가 있었다. 그는 삼십대 중반까지는 모든 종류의 록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재즈로 넘어갔다. 모은 CD만 해도 몇천 장은 될 것이다. 근간에 전해 듣기로는 바로크음악에 도전하고 있다고 한다. 음악뿐만이 아니다. 그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이다. 주로 인문서에 한정돼 있기는 하지만, 언어를 가리지 않고 넘나드는 지독한 책벌레이기도 했다. 이미 가진 것도 많았으나 그는 강박에 걸린 사람처럼 새로운 지식을 갈망했고, 이미 섭렵한 것들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해마다 연말이 되면 들었던 음반과 읽었던 책들과 보았던 영화의 베스트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를 졸졸 따라다니던 이십대 중반까지 나는 취향과 탐닉을 배웠고,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했으며, 세상을 재단했다.
그와 인연이 끊긴 뒤, 나는 홀로 취향의 세계를 설정해가기 시작했다. 그와 내가 공유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문은 소설이었다. 어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는 왠지 내 어깨너머로 그가 나의 감식안을 평가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고, 새로 나온 철학서를 보면 어차피 읽지도 못할 거면서 사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는 나 혼자일 수 있었다. B급 탐정소설이나 철 지난 하이틴 로맨스나 19세기 사실주의 소설이나 대하 서사 팩션은 다 똑같이 나를 맞았다. 나는 그 속에서 길을 잃었고, 즐거웠다. 그러면서도 문득, 그가 가르친 방법론들이 불쑥 들고 일어나 책들 간에 서열을 매기고 줄을 세우려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정말 어쩌다 보니, 나는 소설책을 주로 만드는 편집자가 되었다. 편집자가 되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독자가 책을 고르면서 느끼게 되는 기쁨과 두려움을 만드는 이도 똑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좋은 책을 발견하게 되면 두근두근한다. 널리 읽히기 힘든 책을 만들 때는 어찌 팔 것인가를 두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책을 만드는 세상에서도 책 사이에 줄을 세우고, 서열을 매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책은 다른 책보다 만들거나 팔기가 쉽고, 어떤 책은 포장을 해주고 힘을 주어야만 팔린다. 어쨌든 그 모든 이유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은 역시 ‘파는 문제’다.
나는 그것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팔기 위한’ 책들을 만드는 세상에 여전히 몸담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먹고사는 문제이기도 했고, 고백하건대 그런 과정 중에 느끼는 나름의 스릴과 쾌감도 있었다. 어쨌든 한마디는 독자께 귀띔하고 싶다. ‘파는 사람들’의 말을 다 믿지는 말라는 것. 책 파는 이들 중에는 출판사만 있는 게 아니다. 신문도 있고, 서점도 있고, 평론가도 있고, 소설가도 있고, 학교도 있고,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의 예에서 보았듯 심지어 가끔은 정부도 있다. 무슨 책을 읽지 말라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닌 다른 책을 읽으라는 말이거나, 혹은 ‘바로 그 책을’ 읽으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기도 하다. 또한 무슨 책을 사야 한다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다. 권하는 이가 자신보다 상위에 속하는 담론에 설득당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책과 관계된 커다란 이득의 그물망 안에 위치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그 책이 정말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 겁을 먹거나, 움츠러들거나, 당신의 책읽기 소양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신성한 것은 앞서 말했듯 출판사도, 무슨무슨 문학상도, 평론가도, 소설가도, 기자도, 매체도 아니다. 오로지 그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 누구도 그에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 그 영역에 물을 주고 싹을 틔워 두고두고 가꾸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 순위를 매기는 것까지도 오로지 당신의 몫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선배를 온라인에서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냐, 해야만 하는 일을 할 것이냐’를 두고 끙끙 앓던 나에게 공자를 인용하며 짧게 대답했다.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 라고. 그는 내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 나와 달랐을 뿐.
그를 추억하며 올해 즐겁게 읽은 열 권의 소설 리스트를 공개한다. 올해 출간된 책과 그 이전의 책이 섞여 있고 순위는 없다. 이언 매큐언의 ,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 진 리스의 , 미즈무라 미나에의 , 쓰네카와 고타로의 , 스티븐 갤러웨이의 , 이디스 워튼의 , 아리시마 다케오의 , 빅토르 위고의 ,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읽었지만 처음 읽은 것이나 다름없는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 여러분도 한번 리스트를 만들어보시라. 이게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
그리고 연재를 마치며 2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서툰 글을 읽어주신 분들과 두 담당 기자께 감사드린다. 첫 연재분에 썼던 의 E. M. 포스터의 말처럼, 소설을 읽고 느끼는 마음을 통해 당신들과 나는 이어져 있다.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mmagda@paran.com
*‘소설 읽어주는 여자’는 이번호로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어서 ‘월요일 독서클럽’이 3주마다 연재될 예정입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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