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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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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도 소설이 살고 있었네

등록 2008-06-26 00:00 수정 2020-05-03 04:25

등이 반가운 이유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본격적인 여름 시즌이 시작되었지만, 소설 매출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하루하루 이렇게 재미난 쇼를 보여주고 있는 이 마당에 누가 소설 따윌 보겠는가.

그럼에도 최근 신간 중 반응을 얻고 있는 소설이 한 편 있다. 의 작가 코맥 매카시의 신작 다. 2006년 테이트 메모리얼상, 2007년 퓰리처상을 받고,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에 선정된 도서니(굳이 포스트 9·11이니 트라우마니 들먹이지 않더라도) 미국에서 잘 팔리는 건 딱히 놀라울 게 없지만, 지금 이 시점에 이곳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건 무척이나 신기하고 의미심장한 일이다.

우선 이 책은 독파가 쉽지 않다. 대재앙으로 인류가 전멸한 미대륙을 한 부자가 횡단하며 생존하기 위해 고투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 이 소설은 할리우드 재난영화 같은 극적인 서바이벌 스토리가 아니라,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대사와 주제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는 극히 불친절한 작품이다. 인류의 절멸 앞에서도 여전히 덤덤하게 침묵하는 자연과 문명의 힘을 잃고 개미 한 마리처럼 약해진 인간의 모습. 황폐한 인간 내면과 생존 본능의 이기를 고찰하는 문장들은 바늘 하나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엄정하고, 새벽의 첫 우물물처럼 시리고 차다.

이 책이 왜 잘 팔리고 있는지에 대해 굳이 말도 안 되는 가설을 하나 세워보자면, 어제까지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던 독자들이 돌아서서 바로 말랑한 연애물을 읽는 모드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는 정도다.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외국소설 기획에서 불문율처럼 은밀히 통용되기 시작한 규칙들이 있다. 우선 지나치게 정치적이면 안 된다. 어느 정도 사회적인 것은 용인되지만, 계급 격차나 빈곤을 대놓고 강조하는 책들은 곤란하다. 패셔너블한 구석이 있다면, 동성애는 어느 정도 괜찮다. 인종 문제를 건드리는 책이나 주인공이 유색인종인 책은 절대 팔리지 않는다. 장르물의 경우, 엄정한 과학 지식에 기초한 하드 공상과학소설(SF) 같은 것을 내려면 초판이 5년이 지나도 팔리지 않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3세계 소설을 내는 것은 작가가 노벨상이라도 타지 않은 한, 혹은 설령 탄다 해도, 자살 행위에 가깝다.

언제부터 이런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을까? 늘 그랬던 건 아니다. 가끔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 60, 70년대에 출간된 전집류나 단행본들을 들춰보다가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당대 영미문학의 가장 뜨거운 문제작들뿐만 아니라, 러시아·동유럽의 정치소설, 철학서에 가까운 프랑스 소설, 사변적인 독일 소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뜨거운 역사와 목소리가 담긴 아프리카 소설, 남미 소설들이 ‘이미’ 출간돼 있었다. 그런 책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 책을 그 시절 한국에서 펴내려 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그들의 얼굴이 궁금해지곤 했다.

이제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는 너무나 가벼운 것이 되어서, 심지어 실용처세서를 사들이는 이들의 입에서조차 소설을 읽는 건 한가로운 돈 낭비라는 말이 나온다. 누굴 탓하랴. 시장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독자를 너무 우습게 안 나머지, 미래의 독자에 대한 투자와 재교육을 게을리한 이들의 탓이라고 할밖에. 문학이 죽었다는 흉흉한 이야기가 주기적으로 들려오지만(근데 이건 영화나 연극이나 미술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사실 책을 만드는 이들에게는 비평가들의 이런 머나먼 진단이 핑계가 될 수 없다. 문학비평가나 사회학자라면 팔짱을 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책을 만드는 이들은 시장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새 처럼 묵직한 책이나 와 같은 다양성을 지닌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보이는 건 무척 반가운 일이다. 전 같았으면 아무리 제1세계에서 베스트셀러였다 해도 ‘한국에서 이런 책을 누가 읽겠어’ 하는 심정에 검토조차 하지 않고 바로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조차도 유행일 뿐이라면 좀 암울해지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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