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사라져간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도이머이(개방·개혁) 정책 이후, 베트남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영화 에 묘사된 그림 같은 하롱베이를 보기 위해서일까, 흰 아오자이를 입은 처녀들이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비는 사이공의 활기와 부흥을 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호찌민시의 역사를 읽으며 감개에 젖기 위해서일까.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소설 는 한때 이곳이 안남(Annam)이라 불리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 ‘평안한 남쪽’이라는 뜻의 이 이름은 중국 황제가 내려준 것이었다. 안남의 황제 우옌 안은 농민 반란으로 실각한 뒤, 대국 프랑스에 원조를 청하기 위해 일곱 살 난 아들 칸을 베르사유로 보낸다. 대혁명을 앞둔 루이 16세는 남의 나라를 돌볼 정신이 없었고, 대신 가톨릭교회가 나선다. 피에르 드 브레엔 주교는 부유한 신자들의 황금을 모아 ‘신의 나라’를 수복하기 위해 생장(성 요한)과 생폴(성 바울)이라는 배 두 척에 무장한 선원들, 그리고 열세 명의 도미니크회 수사와 수녀를 태워 보낸다.
괴혈병과 콜레라로 시달린 뒤,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안남에 도착한다. 선원들과 수사·수녀들은 각자의 길을 간다. 무력 진압에 나선 선원들은 사이공 농민들에게 붙잡혀 죽고, 선교활동에 나선 수사들과 수녀들은 농민들 사이로 섞여 들어간다. 그들은 모내기를 하고, 농민들과 서로의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고, 자그만 교회를 세워 미사를 집도한다. 무거운 수사복을 벗어던지고, 수염을 깎고, 머리칼을 드러내고 농민들처럼 살아간다.
그들은 하나하나 잃어가고, 망각해간다. 더위와 우기와 추위가 반복되는 자연 속에서, 에메랄드빛 논에 비친 하늘의 그림자 속에서 영원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잊혀진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종교적 확신들이 침식되어갔다. 여러 해가 지났다. 신앙심이 지워졌고, 오직 시편들과 기쁨만을 남겨놓았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모든 이들이 죽고, 오직 도미니크 신부와 카트린 수녀만 남는다. 나흘 밤낮 비가 내리는 우기 속에서 그들은 사랑을 나눈다. 어린 아들 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우옌 황제가 보낸 군인들은 ‘서로 육체를 나누는 법 없이 눈이 매섭고 말씨가 공격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을 찾아내게 될 줄로’ 기대했다가, 평화롭고 태연하게 잠든 두 육체 앞에서 조용히 물러난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들마저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다.
소설 속에 등장한 프랑스와 베트남의 관계는 실제 역사와는 좀 다르다. 황제의 아들 칸은 베르사유에 혼자 도착한 게 아니라 드 브레엔 주교의 손에 이끌려 왔고, 우옌 황제는 프랑스에 버림받은 게 아니라 미약하나마 프랑스의 무력에 힘입어 정권 탈취에 성공했으며, 몇십 년이 흐른 뒤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한다. 모내기를 거들고 농민과 똑같이 살다 죽어간 소설 속의 선교사들과 달리, 실제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첨병에 서 있었다. 그들이 남긴 유산은 종교가 아니라, 베트남 문자의 알파벳화였다.
콜럼버스와 쿡 선장과 마젤란의 모험 이후, 제국주의는 신대륙과 처녀지를 찾아나선 초기 개척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삼았다. 군인이나 상인이나 종교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공포와 신화를 낳았고, 개척과 모험의 서사들은 늘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거나 신비로 둘러싸였다. 콘래드의 은 그 정점에 선 작품이다.
이 소설을 지배하는 것 역시 온통 죽음의 이미지다. 그러나 그 죽음은 공포와 신화를 만들기보다는 ‘비움’과 ‘해체’를 향하고 있다.
역사나 사실관계를 살핀다면 이 소설이 그리는 ‘안남’은 엄밀히 말해 실제 베트남이라고 할 수 없을 터다. 그것은 이 처녀작을 쓸 당시 21살이던 젊은 소설가 바타유,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 이후 서구 작가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해온 어느 ‘다다를 수 없는 나라’다.
그렇다면, 역자 김화영의 말대로 ‘청룡부대와 백마부대를 파견했던 나라의 독자’인 우리는 이제 베트남에서 무엇을 보는가. 왜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는가. 와 외에 우리는 그곳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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