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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낀 9월 한국 미술판은 연휴가 없다. 거꾸로 더욱 숨가쁘게 생산라인을 가동 중이다. 상상력을 잔뜩 ‘풀업’시킨 국내외 기획자와 수백 명의 작가들이 엄청난 분량의 작품들을 토해놓고 세대결을 한다. 2년마다 열리는 국제 미술 큰잔치인 비엔날레가 광주와 부산, 서울에서 3인3색 시동을 걸었다. 11월까지 중앙과 지방 문화판이 비엔날레 바람에 휩싸이는, ‘코리아날레’의 계절을 막 시작하려는 참이다.
올해 비엔날레 작가들은 저돌적이다. 생선·고기·신발 파는 시장 상가 사이에 끼어 작품 좌판을 벌인다. 사우나탕과 헬스클럽, 해수욕장 모래판 위에 미디어 영상과 설치작품을 내어놓고, 감각을 내쏟고 ‘낭비’한다. 심각하게 봐도, 술렁술렁 봐도 좋다. 첨단의 감성과 후진 제도와 욕망 따위가 뒤섞인 코리아날레의 도가니 속으로 간다. 행선지는 광주와 부산.
“이런 게 작품이라면 도대체 뭘 미술이라고 불러야 하나.”
관객들은 이렇게 반문하며 방황할지도 모른다. 9월5일 개막한 광주 비엔날레(www.gb.or.kr, 062-608-4114, 11월9일까지)와 6일 개막한 부산 비엔날레(www.busanbiennale.org, 051-888-6691~98, 11월15일까지) 전시장에는 날것 그대로의 일상과 현실이 예술로 명명되어 한가득 들어왔다. 미국 뉴욕 맨해튼 곳곳의 부동산 시세표가 액자에 싸여 작품이 된다. 곳곳에 도려내진 도심 건물의 처참한 잔해 사진과 드로잉이 명작처럼 내걸렸다. 작가들이 남극해를 항해하거나 대마도의 신기루를 좇은 일지와 기록들, 심지어 자신이 뱉은 침을 병에 모아 프라이팬에 붓고 굽는 영상 기록, 쿠바 지도자 카스트로의 연설 녹음이 전시장 곳곳을 수놓는다. 그것이 지금 동시대 세계 현대미술의 진행형이라니.
돈에 벌벌 떠는 생활인의 상식으로는 이해 못할 행위들도 수두룩하다. 두 달여 뒤면 기화해서 사라져버릴 대형 나프탈렌 조각, 휘 불면 형상이 사라져버릴 베이비파우더 가루로 그림을 빚어내려고 수천만원의 돈을 들이고 밤새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일부 작가들은 시장 가게 사이에 공방을 차리고 작품을 시장 생필품과 교환한다. 경제학의 법칙을 의도적으로 거스르고, 미학적 선입관들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작업들이다.
올해 광주와 부산의 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의미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동시대 세계 미술의 흐름에 충실하려 했다. 지난해 신정아 파문으로 이사진이 총사퇴하면서 차질을 빚었던 광주 비엔날레는 형식 파격을 시도했다. 아예 주제를 두지 않고 36개국 127명의 작가들이 ‘길 위에서’ ‘제안’ ‘끼워넣기’의 세 섹션(구획)으로 나뉘어 5군데 전시공간에서 100개 넘는 전시를 꾸렸다. 출품작 중 상당수는 지난해와 올해 서구와 아시아 등에서 치렀던 전시 일부를 재현한 것. 섹션도 잘 구분되지 않는다.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국제 기획자인 오쿠이 엔위저 총감독은 ‘연례 보고’식 전시라는 것을 역설한다. 동시대 세계 곳곳의 다기한 전시와 미술 교류의 현장 상황을 모아서 생생하게 알려주고 교감해보자는 뜻이다.
평론가 김원방씨와 기획자 전승보씨가 각각 현대미술전과 바다미술제를 기획한 부산 비엔날레는 프랑스 철학자 바타유의 명제에서 빌려온 ‘낭비’ 개념이 주제다. 사회가 과잉 생산한 에너지를 써서 없애버리는 낭비야말로 예술의 생산적 본질이라는 역설을 40개국 작가 189명의 작품들로 전한다. 하지만 특정 주제나 성격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본디 비엔날레는 2년마다 국제 미술계 주요 트렌드의 특징을 짚어 소개하는 보고전이다. 물처럼 우리 삶과 일상, 정치와 사회 영역으로까지 스며들려고 하는 현대 미술의 노골적인 확장 욕망을 주시하는 것이 편하다.
광주 비엔날레관의 본전시는 엔위저의 조언처럼 1·2전시장이 핵심이다. 음악, 연극, 영상 등의 장르 복합 공간으로 엔위저의 전시철학을 가장 단적으로 담고있다. 박제된 공작, 독수리, 암사자, 소 등을 역으로 세운 뒤 4인조 음악 연주를 들려주는 남아프리카 작가 숀벨트의 이색 설치, 흑인 슬럼가를 연극무대처럼 재현한 마샬의 설치작업, 기묘하게 우그러지고 접붙여진 매튜 모나한의 얼굴상, 카스트로의 목소리를 섬뜩한 기계음처럼 변질시킨 쿠바 작가 호세 토이락 등의 작업이 보인다. 백남준과 같이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독일 거장 한스 하케는 바닥 위에서 흰 천이 물결치듯 움직이는 설치작품과 뉴욕의 부동산 지적도를 소재로 한 정치미술을 선보인다. 부친의 곡절 많은 생애사를 각색한 조해준씨의 다큐멘터리 드로잉, 팔레스타인 국경을 가로지르면서 물감을 흩뿌리는 벨기에 작가 알뤼스의 기록 영상이 색다르다.
5전시장에서는 일본 규슈 부근의 무인도 군함섬에 얽힌 역사적 기억들을 독일 작가가 파헤쳐 들어간 다큐 영상이 눈길을 끈다. 인근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 낡은 건물을 기하학적으로 절개하고 해부하는 콘셉트의 작업으로 충격을 안긴 요절 거장 고든 마타 클락의 사진과 드로잉들이 보인다. 엔위저는 치밀한 계획과 작가들과의 사전 교감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동선을 짰고, 전시 자체의 완성도도 높다는 평을 받는다. 외형은 깔끔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각양각색 전시들을 종합 정리한 보수적인 보고서 전시가 된다. 대중을 잡아끌 만한 매혹적 화두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부산의 경우, 시립미술관 전관의 현대미술전은 기획자가 낭비란 주제에 걸맞게 또 다른 낭비 행위인 성행위 과정의 단계를 암시하는 작품 동선을 짰다. 1층에서 2층, 3층으로 올라갈수록 작품들은 전희·흥분·절정·허무라는 섹스의 코드를 암시하며 작가의 자아가 분열됐다가 통합돼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1층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세일러 마스가 비늘이 덮인 거대한 설치조형물로 등장한다. 성적 긴장감 혹은 공포감을 조성하는 구도다. 테렌스 고라는 캐나다 작가는 사탕비석을 만들어 자신의 죽음을 떼어내 먹거나 핥는 모습을 보여준다. 2층에서는 인체조각의 거푸집인 캐스트를 마리아로, 떠낸 인체상을 예수로 삼은 이용백씨의 를 전시하며 분열되는 자아를 보여준다. 3층에서는 제여란씨와 여러 페미니즘 작가들의 강렬한 회화 작품, 레이저 광선이 밀폐된 방 곳곳을 때리는 시미즈지오의 레이저 아트 등이 절정감을 고조시킨다. 말미는 넓은 흰 벽에 ‘+, -, 무한대’ 표시가 각각 꼭지에 새겨진 나사만 세 개를 박아넣은 일본 요절 작가의 미니멀한 작품으로 마무리한다.
금련산역에서 광안리 해수욕장을 거쳐 인근 놀이공원, 상가, 미월드까지 작품들이 흩어진 바다미술제는 아트산책 코스로 발품을 팔 만하다. 이곳이 고향인 기획자는 이전에 헬스 사우나장, 예식장이던 건물에 시공간의 추상성과 구체적 기억을 대비시키는 77명의 영상·설치작품들을 가득 부어넣었다. 참여작가 배인석씨는 해수욕장 뒷골목의 미술문화공간 강에서 디자인을 버려 돈을 버는 유흥가 클럽, 일숫돈 업체 등의 전단지를 샅샅이 모아 재구성했다. 또 다른 딸림행사인 수영강변 에이펙 나루 공원에서는 로버트 모리스, 데니스 오펜하임 등 거장의 조각들을 보여주는 조각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행사를 주관하는 지자체 사이의 기싸움도 비엔날레 감상에 한몫한다. 광주와 후발주자 부산 사이에는 비엔날레 주도권을 놓고 보이지 않는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 개막일과 전시 기간도 두 도시가 거의 겹친다. 전시 비용 40억여원으로 광주의 절반에 불과한 부산이 초대 작가 규모나 출신 나라, 특별행사는 더 많다.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들어가는 비엔날레를 한 나라에서 두 도시가 경쟁하는 건 희귀하다. 지자체들 사이의 실적 과시를 위한 정치적 욕망이 미술인들의 표현 욕망과 어우러지면서 비엔날레의 맛을 한층 미묘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두 전시 모두 일상에 시시콜콜 관여하는 요즘 현대미술의 실천 방식을 끌어들였다.
그런 맥락에서 광주의 전시 마인드에는 부산의 전위 전시가 자연스럽게 포괄되고, 부산의 낭비 콘셉트에도 광주의 제3세계 출품작들은 잘 어울린다. 9월12일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26개국 69개팀이 참가해 막을 올리는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에도 ‘전환과 확장’이란 주제 아래 국내외 영상, 인터랙티브 작품 80여 점이 나올 예정이지만, 현대미술의 현황을 교감한다는 측면에서 틀거지가 다르지 않다.
한·중·일 유례없는 미술대전비슷한 시기 아시아권에서도 광주·부산과 비슷한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국제미술품판매전 등이 줄을 이을 참이어서 유례없는 동아시아 미술대전이 불붙을 전망이다. 중국 상하이 비엔날레(9~11월), 싱가포르 비엔날레(9~11월), 타이베이 비엔날레(9월~2009년 1월), 3년마다 열리는 일본 요코하마 트리엔날레(9~11월), 중국 광저우 트리엔날레(9~11월) 등이 계속되고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9월19~23일 서울 코엑스)와 상하이 컨템퍼러리 아트페어 등도 열린다. 미술시장의 패권이라는 중대한 문화산업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하반기 이 대형행사들의 과실이 어떻게 분배될지가 이후 동아시아 미술판의 판도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예측들이 많다.
광주·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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