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대평가 말고 재지 말고 다만 첫 번째 대화니까 첫 번째 연습이니까 소중하게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학 임상심리학과 교수
“끔찍해요.” “뭐가요?” “끔찍하단 말이에요. 그럼 제가 일시적으로 정자 보관소가 되는 거잖아요? 게다가 임신하면 어떡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이 아가씨는 자못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인생관만큼이나 분명한 자신의 첫경험에 대한 견해를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허, 이거야말로 정말 새로운 진단명이 필요하군. ‘정자공포증’이란 진단명.
렌즈 처음 끼는 것도 이리 호들갑을 떨까
그녀의 말은 한편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줄여서 . 이 영화의 첫 대사가 바로 “쓰레기들, 끔찍해요. 쓰레기들” 뭐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게 바로 여주인공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은밀한 은유 같은 것이었는데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내담자, 아직까지 혼자 산다.
첫경험. 이 지구상에 이것처럼 부풀려지고 뻥튀기된 시쳇말로 ‘킹왕짱’의 판타지가 또 있다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상담 장면에서 마주 대하게 되는 내담자(상담받는 사람)들의 첫경험에 대한 기억의 당의정을 걷어내면 낙원의 저편에는 두려움과 당혹감, 공포와 실망감의 응어리가 방울뱀의 그것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여성 내담자들이 고백한 첫경험의 경험담에는 임신에 대한 공포와 자신의 육체에 손상이 가해진다는 두려움, 낯선 남자의 물건을 처음 봤을 때의 질겁할 것 같은 기이함, 결코 자신의 육체를 남자 앞에서 내보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등등이 있다. 때론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무한정 그 ‘백마 탄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첫경험을 질질 미루거나, 마지막 팬티끈을 부여잡고 절대로 놓지 않을 때도 있고.
마치 콘택트렌즈를 처음 낄 때처럼 말이다
회상해보시라. 처음으로 콘텍트렌즈를 낄 때를. 눈은 자신 안에 들어오는 렌즈란 이물질에 결사 항전하며 계속해서 눈꺼풀을 깜빡인다. 두려움 때문에 경직된 안구에 렌즈가 돌진할 때면 사람들은 대개 눈을 위로 치켜뜨며 어떻게든 이 사태를 모면해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아무도 콘택트렌즈를 끼는 첫경험의 황홀함을 재차 삼차 반복해서 TV와 각종 영화관에서 영접하진 않는다.
그러나 첫경험에 대해서만큼은 다르다. 여기 모 잡지의 표지 기사를 좀 보라. “무엇이든 처음이란 말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특히 첫 섹스 경험은 누구에게나 흥분되고 잊지 못할 경험이기도 하다.” 이거야말로 ‘제기랄!’. 솔직하게 오픈 업. 당신의 첫경험은 어땠는가? → ‘아팠다’
“상대를 ‘일부러’ 골랐어요”
반면 남성 내담자들의 경우 첫경험은 두려움의 계곡을 헤매는 일만은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첫경험을 빨리 하고 싶어하거나, 적어도 너무 하고 싶은데 여자친구 보호 차원에서 꾹 참는다는 취지가 많다. 이른바 남자들은 성에 대한 호기심이 첫경험의 출발이다. 당연한 것이 남자들이 아이를 낳는 것도 아니고, 처녀막이 있어서 피를 흘리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들은 ‘총각 딱지’를 뗀다고 말할 만큼 성 경험 자체가 남자 세계에서 승수를 쌓는 것이 되니까.
따라서 상담 시간에 대부분 등장하는 남자 대학생들의 첫경험은 유곽에서 딱지를 뗀 총각들이 ‘혹 나쁜 병에라도 걸렸으면 어떡하나’라는 취지의 조심스런 말 건넴이나, 어떻게 하면 이제 막 데이트를 서너 번 한 여자친구를 ‘자빠뜨릴 수 있는가’에 대한 빙빙 돌린 질문들이 가장 많다. 개중에는 선배들이 거기에 소주를 부으면 소독이 된다는 말을 듣고, 유곽에서 총각 딱지를 뗀 뒤 소주를 잔뜩 들이켠 게 아니라, 소주를 잔뜩 부었다는 웃지 못할 사연까지 등장한다.
나는 그때마다, 내담자에게 “혹 군대 가서 땅을 파본 적 있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그들 대부분은 ‘있다’고 대답한다(사실 ‘없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땅을 어떻게 파야 큰 구덩이가 되냐고 물어본다. 대부분 어안이 벙벙해서 삽질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해준다. “행복하고 안전한 섹스가 큰 구덩이를 파는 것이라면, 이를 위해 해야 하는 첫 삽질이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해보자”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첫경험에 대해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는 10시간 동안 무려 251명의 남성과 성관계를 가진 뒤, 그것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던 ‘애너벨 청’, 그녀였다. 2000년께, 방한한 애너벨 청을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그가 페미니스트냐 아니냐, 포르노 배우냐 아니냐 같은 우스꽝스러운 논쟁이 도마 위에 올라가 있을 때였다. 개인적으로 애너벨 청 그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당대 논객이라는 사람들이 어찌 저리 이분법적 경계짓기를 자신 마음대로 하는지가 더 흥미로웠다.) 그에게 첫경험에 대해 물어보자, 놀랍게도 그는 안전하게 첫날밤을 치르고 싶은 마음에 상대를 ‘일부러’ 골랐다고 웃으며 고백했다! 즉, 경험이 많고 능숙하게 첫경험을 이끌 것 같은 늙은 남자, 낯선 남자와 첫날밤을 치러냈다는 것이다. 암튼 귀동냥한 첫경험의 이야기 중에 가장 계획적이고 가장 덜 정서적이었으며, 가장 합목적적 행위로 첫경험을 정의한지라, 필자는 적잖이 놀랐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날이 올까. 어머니의 지지에 힘입어 18살에 자신의 남자친구와 집에서 첫경험을 치러냈다는 영화배우 시에나 밀러처럼, 아니면 아들에게 ‘빨리 첫경험을 하라’고 들들 볶는 아버지에게 “됐어요. 저는 여자와 침대 위에서 뒹구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을 훨씬 좋아해요. 여자와 자느니 차라리 숙제를 하겠어요”라고 말했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처럼. 가능한 것일까. 이 땅의 여성들이 자신이 자는 침대에서 첫경험을 치러낼 수 있는 날은.
돈을 쓰고 마음을 쓰라
사실 첫경험은 두 사람이 육체로 빚어내는 대화의 시작이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너무 재지 말고, 너무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너무 누군가에게 줘버리겠다는 식으로 내다버리지도 말고. 다만 첫 번째 대화니까 첫 번째 연습이니까, 마치 처음 두 입술이 언어를 배울 때처럼 좀 거품을 빼라는 것이다. 조금 삐걱대거나 조금 힘들었거나 조금 싫었거나 조금 유치했거나 조금 별거 아니더라도 그 이후에는 기나긴 즐거움의 낙원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그리하여 세상의 많은 일처럼 첫경험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본다. 1박2일의 여행도 그렇게 많은 확인과 준비가 필요하거늘, 첫경험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학교 뒷동산의 수풀보다야 근사한 바다나 강이 눈앞에 펼쳐진 아담한 호텔 방이 더 좋겠고, 무조건 사랑한다는 고백보다는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조그만 이벤트가 있으면 더 좋겠고, 술에 취해 무엇이 지나가버렸는지 모르겠는 서늘한 밤보다야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는 행복한 밤이 더 좋겠고. 남성들은 준비하고(돈을 쓰라!), 여성들은 허락하라(마음을 쓰라!).
당신의 첫경험이 행복한 그것이었다면, 당신은 인생이란 계좌에서 가장 행복한 기억의 펀드를 가지고 있게 될 터이니. 그러나 그 첫경험이 이후 모든 남녀 관계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이 ‘인생 펀드’처럼, 세상의 모든 일처럼 오르락내리락 적자일 수도, 흑자일 수도, 심지어 대박일 수도 있거늘. 그러니 오늘 밤, 오늘 밤만 생각하라.
오늘 밤, 당신을 위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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