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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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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얼굴로 돌아보라

등록 2008-03-28 00:00 수정 2020-05-03 04:25

드라마가 패러디하고 어린 가수들이 부르는 90년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30대들이 동생에 열광하고 스타들과 함께 늙어가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그리워라 1990년대, 노래라도 불러야 할 판이다. 여기도 90년대, 저기도 90년대, 온통 90년대다. TV를 켜면 90년대의 히로인 최진실이 아줌마 ‘빠마’를 하고 나와서 “아나 초콜릿을 아나”라며 대놓고 90년대 광고를 패러디하고, 라디오에서는 가수 박혜경이 리메이크한 피노키오의 90년대 히트곡 가 흘러나온다. 1998년 데뷔한 장수 아이돌 그룹 신화는 최근에 결성 10주년을 맞았다. 오늘도 네이버의 첫 화면엔 김동률과 토이 유희열이 나란히 서 있다.

80년대는 구리고 90년대는 그리워

이렇게 ‘90년대 싱어송라이터’의 순위를 매기느라 2008년에도 대한민국은 바쁘다. 음반산업이 극심한 불황에 시달려도, 어떤 90년대 가수들의 음반은 여전히 팔린다. 올해 발표된 토이 유희열의 새 음반은 8만 장 가까이 판매돼 지난해 로 국민가요 열풍을 일으켰던 원더걸스의 음반보다 많이 팔렸다. 대표적인 90년대 가수 이승철 콘서트의 열기가 2000년대 스타 성시경 못지않다. 이렇게 90년대 스타의 귀환은 갈수록 열기가 뜨겁다. 최근엔 90년대 ‘문화 대통령’ 서태지가 자동차 광고 모델로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돌아왔다. “8집으로 2008년을 접수한다”는 서태지의 호언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한국방송 의 ‘불후의 명곡’엔 90년대 스타들이 잇따라 출연한다. 신승훈·김건모는 물론이고 박상민의 90년대 노래들이 명곡의 반열에 올랐다. 90년대 아이돌 스타 S.E.S ‘언니들’과, 90년대 해마다 여름을 쿨하게 해줬던 그룹 쿨이 ‘불후의 명곡’에서 잠시나마 다시 뭉쳤다.

그러니까 90년대엔 80년대가 돌아보기 싫은 ‘구린’ 기억이었다면, 2000년대엔 90년대를 그리운 얼굴로 돌아본다. 때 이른 그리움이다. 이렇게 90년대 대중문화는 힘이 세다. 일찍이 90년대에, 대중문화로 추억하기엔 80년대는 ‘안 좋은’ 기억이 너무도 많은 시절이었다. 독재라는 정치적 장벽이 있었고,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적 추억도 부족했다.

이런 90년대의 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태초에 ‘X세대’ 혹은 ‘신세대’가 있었다. 90년대 초·중반 정치적 강박에서 자유롭고 문화적 표현에서 거침없는 신세대가 등장했다. 70년대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나서 80년대 고도성장기에 중고생 시절을 보내고 90년대 대중문화의 중흥기에 청년기를 보낸 이들이다. 이들은 운 좋게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세대다. 입에는 은색 CD를 물고 손에는 리모컨을 들고 성장한, 어쩌면 축복받은 세대다. 역시나 ‘다행히’ 이들의 상당수는 외환위기 한파가 몰아치기 직전에 회사문을 통과해 막차로 정규직 일자리를 얻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았지만, 90년대는 원형이 만들어지던 시대였다. 돌아보니 한국 드라마의 시원이고, 가요의 황금기였다. 미니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감수성의 ‘트렌디 드라마’가 시작됐고, 100만 장 이상 팔리는 가요 음반이 한 해에 여러 장 나오던 시대였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도 그 시절에 시작됐다. 이제는 한자리에 도저히 모으기조차 어려운 장동건과 손지창과 심은하와 신은경이 한 드라마()에 한꺼번에 나오던 시대였다.

이렇게 90년대 초·중반에 데뷔한 배우인 장동건, 배용준, 이영애 등은 ‘아직도’ 혹은 ‘여전히’ 스타 중의 스타다. 이문혁 CJ엔터테인먼트 드라마사업팀 PD는 배용준을 두고 “3번 연임한 대통령 같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90년대 스타들은 대중문화 황금기에 선점한 기득권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문혁 PD는 “2000년대 드라마 제작 환경이 어려워지니까 드라마 주연으로 더욱 검증된 스타만 찾게 된다”며 “그렇게 기획이 몰리니까 그들이 계속 최고로 남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90년대에 데뷔한 배우들은 드라마 시청률의 보증수표, 영화의 티켓파워로 인정받는 여전히 ‘팔리는’ 스타다.

90년대 가요계 스타들은 2000년대 기획사 ‘사장님’으로 변신했다. JYP의 박진영,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등은 여전히 가요계의 실력자다. 이것은 80년대까지 가수들이 전성기 이후에 사라졌던 방식과 다르다.

꽃들은 새로움을 익힐 여력이 없네

이제는 아줌마·아저씨가 됐지만 90년대의 신세대는 여전히 열정적인 문화 소비자다. 특히 30대 여성들은 대중문화를 좌우하는 큰손으로 남아 있다. 이제는 열정과 함께 구매력도 갖춘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콘서트에 기꺼이 10만원을 지불하고 입장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한국에서 스타와 팬들이 함께 나이 들어가는, 대중문화 소비자로 늙어가는 첫 번째 세대가 되었다. 이전의 세대가 30대만 되면 누군가의 팬에서 생활인으로 ‘돌변하는’ 경향이 강했다면, 이들은 30대가 돼서도 여전히 이승철·신승훈의 팬으로 남는다. 유구한 취향의 단절을 극복한 세대인 것이다. 이렇게 취향의 연속성은 90년대 청년기를 보낸 세대의 특징이다. 이문혁 PD는 “웰빙, 뮤지컬, 와인까지 이들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며 “X세대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여전히 건재하다”고 분석했다. 골드미스 담론에서 보이듯이 경제적 여유를 가진 30대 여성은 웰빙을 선도하고 뮤지컬을 관람하는 주요 집단이다. 이명석 문화평론가는 “얼리어답터 중에도 30대가 많다”고 전한다. 성인이 돼서도 만화를 즐기고 완구를 모으는 키덜트 현상도 이들 세대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 20대 꽃 같은 청춘은 어디로 갔을까. 90년대 문화의 총아가 10~20대였다면, 오늘날 문화의 총아는 20대가 아니다. 오죽하면 “지금의 20대는 행려병자보다 돈이 없고, 고3보다 시간이 없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겠는가.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에 취직한 세대와 그 이후 세대 사이에 물리적 시간과 경제적 여유의 간극은 크다. 이른바 ‘88만원 세대’ 현상이 문화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이문혁 PD는 “현실이 이러니 20대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현실을 다루면 너무 심란해지고, 현실을 다루지 않으면 뜬금없는 이야기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30대는 간신히 간신히 돈과 시간의 여유가 있다”며 “그래서 아줌마 판타지는 그나마 가능하다”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서 리메이크가 ‘남발’되는 맥락도 다르지 않다. 살기가 팍팍해 새로운 음을 익힐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모와 삼촌은 90년대 신세대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교생 가수 이승기가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을 담은 를 부르자 이승기를 응원하는 ‘이모부대’가 커밍아웃했다. 그로부터 10~20대 스타의 팬들인 30~40대 여성을 뜻하는 ‘이모부대’는 새삼스런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 원더걸스의 열풍과 함께 ‘삼촌부대’까지 등장했다. 어느새 이모부대·삼촌부대는 국민가수를 ‘점지하는’ 자리에 올랐다. 이모부대가 응원하기 시작하자 동방신기는 ‘국민 아이돌’의 반열에 올랐고, 삼촌부대가 따라하기 시작하자 원더걸스의 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들에게 ‘어필하지’ 않고는 국민스타 반열에 오르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스타가 되려면 ‘연하남’이 되어라

이제 스타가 되기 위해서 ‘연하남’ 이미지가 필요하다. 예컨대 가수 비의 팬이라면, 오빠부대보다는 누나부대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비에게 투영된 건실한 청년의 이미지는 뒤집어보면 연상녀의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최근에 인기 있는 남성상인 ‘완소남’에도 연하남의 이미지가 투영돼 있다. 케이블 방송에선 30대 연상녀가 20대 연하남을 보살피며 연애하는 이 인기를 얻었다. 이제 아이돌 스타를 키우는 기획사도 이모부대에 신경쓰는 상황이다. SM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30대 팬들이 음반 판매와 콘서트에 영향을 끼칠 만큼 많아졌다”며 “팬클럽 사이트에도 30대 게시판이 따로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이제 콘서트에 ‘동방신기 이모부대가 왔다’ 같은 펼침막은 예사로이 등장한다. 딸이 동방신기 멤버인 유노윤호의 팬이라면 엄마는 또 다른 멤버인 시아준수의 팬인 경우도 적잖고, 아들과 함께 소녀시대 공연을 보러 가는 부모도 있다. 세븐의 해외 공연을 따라가는 팬들도 열정과 재력을 겸비한 이모부대다.

이들은 90년대 싱어송라이터의 지지 기반이다. 토이, 김동률, 이적의 잇따른 성공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이들은 음반을 사면서 스타와 함께 늙어가는 첫 번째 세대이자 마지막 세대”라고 지적했다. 기획사 시스템이 가요계를 완전히 장악한 2000년대 이후로 싱어송라이터는 인디가 아니면 활동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제2의 김동률, 제2의 유희열은 나오기 쉽지 않다. 더구나 90년대 싱어송라이터들은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적 자양분 위에서 자랐다. 하지만 2000년대엔 그러한 토대가 붕괴돼버렸다. 리메이크의 범람이 불러온 결과다. 이제는 심지어 90년대 후반의 노래까지 다시 부른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90년대 가요의 리메이크에 대해 “10대와 20대 초반에겐 새로운 노래, 30~40대에겐 추억의 노래로 들린다”고 말했다. 작사·작곡의 노고를 들이지 않고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는 방법인 것이다.

이들은 공유하는 문화적 자산이 있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가능한 패러디가 통한다. 지금껏 패러디가 특정 관객층이 선택한 영화에서 이들이 이해하는 한도 안에서 이용됐다면, 이제 패러디는 불특정 다수가 보는 드라마로 확산되고 있다. 90년대 코드를 적절히 활용하는 드라마 등에서 이러한 징후가 보인다. 이제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코드가 있을 만큼 한국의 대중문화가 진화했다는 방증이다.

이들에겐 또한 도구가 있다. 인터넷은 시간을 적게 들여도 문화적 개입이 가능한 환경을 제공한다. 더구나 이들은 PC통신 시절부터 컴퓨터를 시작한,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다. 이렇게 이들은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평가하고 공유한다.

일본의 버블 세대와 유사

어쩌면 이들은 68혁명을 경험했던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와 유사하다. 하지만 한국의 X세대에겐 공동체 지향, 탈권위 경향이 68세대만큼 강하진 않다. 그래서 김작가는 “X세대는 스타일과 트렌드로 자신을 증명하는 점에서 오히려 일본의 버블 세대와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앞날은 어떠할까. 강명석 〈매거진t〉 기획위원은 “한류를 주도하는 일본의 중·장년 여성들처럼 한국에도 그렇게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할 세대가 등장한 것이 아닐까”라고 전망했다. 욘사마의 팬들처럼 이들도 먼 훗날 흰 머리카락 휘날리며 여전히 세상을 휘젓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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