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더분한 구레나룻의 브라질 할아버지가 피아노를 친다. 그 옆에 동부 독일의 명문 악단을 이끄는 깐깐한 이탈리아 지휘자가 눈빛을 마주 비비며 지휘봉을 휘저었다. 64살의 피아니스트 넬손 프레이리와 50대 초반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 둘의 눈빛을 우수의 작곡가 브람스(1833~97)의 피아노 협주곡이 이어주었다. 연주자의 손끝에서 격정과 고뇌가 마그마처럼 분출하는 협주곡 1번과 2번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라이프치히게반트하우스 교향악단은 브람스 특유의 진중한 독일 정신을 중후하게 떠받쳐주었다.
그 결실로 브람스 피아노곡 연주의 새 명품이 탄생했다. 영국 음반사 데카에서 2000년 쇼팽 곡으로 전속 데뷔 음반을 낸 뒤 세계적 유명세를 얻은 대기만성형 거장 프레이리가 이 브람스 명연을 데카의 새 음반 선물로 국내에 들고 왔다.
브람스협주곡 1번은 매우 격렬하고 극적이다. 스승 슈만이 미쳐 자살을 꾀하고 슈만 부인 클라라에 대한 연정은 더욱 깊어졌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번민에 휩싸여 지었던 까닭이다. 맹렬히 우짖는 듯한 1번 1악장 들머리의 서두 강주와 다소곳이 이어지는 피아노 독주, 바흐 곡처럼 같은 음률들이 잇따라 되풀이되면서 격렬하게 내달리는 3악장의 긴박감. 23년 뒤 작곡한 협주곡 2번은 피아노와 관현악이 한 몸이 된 유장, 원숙한 선율미의 덩어리다. 새 음반에서 프레이리의 선율은 흥분하지도 지나치게 침잠하지도 않는다. 1번의 경우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는 서로 맞서며 기싸움을 하게 마련인데, 샤이와 프레이리는 그런 기색 없이 자연스런 교감으로 브람스의 비탄과 흥분, 관조를 떠낸다. 무위의 강처럼 격정과 평온의 선율이 흘러가는 2번은 유람선을 타고 조용히 떠내려가는 듯한 느낌으로 남는다. 프레이리는 이 음반으로 영국 지의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다. 그는 12월27일 서울로 날아와 예술의전당에서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브람스 협주곡 2번을 직접 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