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인가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그는 왜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도전하는가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장하준 교수는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경제학자이고, 가장 잘못 알려진 경제학자이다. 언론 매체들은 언제부터인가 정부 정책을 꼬집고 싶을 때 그를 인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케임브리지대 교수’ 라는 화려한 후광도 한몫한다. 그러나 장 교수는 (장하준·정승일 지음, 이종태 엮음, 부키 펴냄, 2005년)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도대체 정체가 뭐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 우리 논의 중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부분만 골라 ‘보수’다 ‘극좌’다 하는 딱지를 붙여 비판하는 분들도 적지 않게 겪었다.”

경제개발에서 국가의 역할

개발도상국에서 국가의 시장 개입이 경제개발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장 교수의 논리는 시장의 자율성을 외치는 신자유주의를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공격한다. 그러나 이것은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도전적이다. 좌파는 박정희식 산업 정책과 재벌 옹호, 소액주주 운동 비판 등이 불쾌하고, 우파는 신자유주의를 짓밟는 논리가 아주 거슬린다. 어쨌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깃발이 휘날리는 지금은, ‘내 편’인지 ‘네 편’인지를 떠나 그의 논점을 진지하게 토론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에서 출판된 그의 저작들을 살펴보자.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부키 펴냄, 2004년)는 선진국이 경제 발전을 위해 채택한 정책과 제도를 역사적 접근법으로 분석한 논문이다. 이 책은 “선진국들은 자유무역으로 지금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신화를 깨버린다. 그 신화의 뒤편에는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그래서 사라져버린 경제개발의 역사가 있다. 선진국들, 특히 영·미는 국가의 강력한 시장 개입과 보호주의를 통해 지금의 위치에 올라서고는, 후진국들이 따라잡지 못하도록 자유무역과 시장 개입 금지를 강요한다. 이른바 ‘사다리 걷어차기’다.

영국 정부는 1721년 상법 개정 이후부터 제조업을 장려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짰다. 수출 관세를 폐지하는 대신 수입 제조품의 관세는 현저하게 올리고, 수출보조금을 확대했다. 미국은 알려진 바와 달리 19세기 초기부터 1920년대 사이 가장 강력한 보호주의를 사용한 국가였다. 말 그대로 보호주의 정책의 철옹성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뤘다. 남북전쟁의 숨은 동력도 제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높은 관세를 주장한 북부와 관세 인하를 원한 남부 지주들과의 갈등이었다. 민주주의·재산권 보호·기업 지배구조·금융·사회복지 등 지금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에 즉시 시행하라고 요구하는 제도 역시 그들이 개발도상국 시절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장하준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부키 펴냄, 2006년)은 신자유주의, 혹은 그 배경이 되는 신고전경제학파에 대한 매우 진지하고 이론적인 비판이다.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거시경제 정책이 힘을 잃고, 1970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세계는 소득 불평등의 수렁에 빠지고 1인당 소득의 증가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런 처참한 성적표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황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대체 문제는 무엇일까.

장 교수는 신자유주의 이론의 내적 모순을 지적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우선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망가진다. 태초에 시장이 있었다, 그리고 세계는 고립된 개인들로 득실댄다…. 이런 관점은 시장과 국가 사이의 경계가 어딘지, ‘이상적 시장’이 과연 존재하는지, 시장에서 정치를 제거할 수 있는지 등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시장은 윤리나 도덕을(자유시장은 선, 개입은 악) 끌어대야 성립할 수 있는 공상이다. 여기서 장 교수는 ‘제도주의적 접근’을 제안한다. 시장은 제도들에 우선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같은 제도의 하나일 뿐이다. 그 제도들은 서로 밀접한 네트워크를 갖고 움직인다.

따라서 경제개발에서 국가라는 ‘제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경제개발을 위해 국가는 비전을 제시하는 ‘기업가적’ 역할과 ‘갈등 조정자’의 역할을 해서 산업구조를 바꾼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동아시아와 북유럽이다. 한국·일본·대만 등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선별적 산업정책(국가가 경제발전에 필요한 특정 산업에 투자를 강제하는 등의 정책)을 실행하면서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북유럽은 국가가 기업과 노조의 ‘대타협’을 주도해서 성장을 일구어냈다.

장 교수는 세계화라는 상황에서도 적절한 국가 개입이 경제발전에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개발도상국들이 외국인 직접투자와 초국적 기업에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외국인 직접투자의 3분의 2 이상이 선진국 간에 발생하고 있으며 나머지도 중국에 몰려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외국인 직접투자에 크게 의존하지 않으며 경제성장을 이뤘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초국적 기업과 현지 국가의 이해가 일치한다고 ‘순진하게’ 믿는다. 그러나 자본에는 명백히 국적이 있다. 대부분의 초국적 기업들은 연구·개발 등 핵심 부문을 자국에서 절대 이동시키지 않는다. 규제를 하면 초국적 기업이 보따리를 싸서 다른 나라로 도망가버릴까? 생산설비를 옮기기가 어렵거나 그 나라 이외에서는 거의 생산이 불가능하다면 초국적 기업의 이동성은 줄어든다. 즉, 규제를 철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의 가능성, 우수한 사회간접시설과 뛰어난 노동력 등이다. 이런 환경을 만드는 것은 초국적 기업이 아니라 국가다.

재벌, 인정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

는 한국 경제의 여러 문제에 대한 장하준·정승일 교수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두 학자의 대화는 차분하게 이어지지만, 매우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장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에 들어온 ‘개혁’이라는 종교에 대해 시비를 건다. 그는 일부 진보 경제학자들이 외환위기의 원인을 고도성장기부터 진행된 재벌들의 과잉투자에서 찾지만,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외환위기는 90년대 초반 금융시장이 개방되고 외채 규모가 불어나면서 터졌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저성장·저투자 문제의 원인이 주주 자본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주주 자본주의 아래에선 기업들은 배당금을 올려주고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비해 자사주를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노동 시장도 유연화된다. 소액주주 운동은 이런 면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재벌의 문제다. 장 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1960년대 한국은 기술력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대기업 중심으로 나아가야 하는 국가였다. 또 자본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업 다각화를 통해 자본을 동원해야 했다. 90년대 초반부터 재벌들은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었다. 신자유주의를 들여오면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룹의 전체 주식 중 극소수만 소유하고 있는 재벌들은 소유권의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노동 역시 자기 발등을 찍었다. 재벌의 틀을 깨면 노동자들이 덕을 볼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과정에서 재미를 보는 것은 외국인 투자자와 금융자본뿐이다. 반신자유주의와 반재벌 투쟁은 같이 갈 수 없다. 진보 진영이 ‘모든 것이 박정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박정희식 경제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따라서 대안은 재벌 시스템을 일정 부분 인정해주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역할을 이끌어내는 대타협이다.’

은 장 교수의 논점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진보 진영 경제학자의 비판을 싣는다. 매일같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과 대결해야 하는 지금,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