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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2007, 거대담론의 시대를 향해

등록 2006-12-21 00:00 수정 2020-05-03 04:24

‘새로운 대중과 정치적 이성’으로 이론을 고민하는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거대담론의 몰락도 정확히 말하면, 몰락보다는 잠복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여러 단편화된 형태로, 또는 숨은 영감의 원천으로 지금도 그대로 존속한다.”

2007년은 여러모로 ‘거대담론’의 부활을 알리는 한 해가 될 공산이 크다. 우선 5·16 군사 쿠데타에서 시작된 오랜 군부독재의 종말을 불러온 1987년 6월 민주대항쟁이 내년으로 20주년을 맞는다. 그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군사정권은 교묘한 방식으로 생명을 연장했지만, 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로 이어진 이후의 역사는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숙성 과정과 다름없다. 항쟁 20주년은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내용적·형식적 민주주의로 가는 성찰적 모색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2007년은 또 비정규직과 양극화란 우리 사회의 ‘고질’을 불러온 1997년 구제금융 체제가 옹근 10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도적처럼 덤벼든 외환위기 앞에서 ‘구조조정’의 칼바람은 온 사회를 찢어놓았고, 10년 세월이 지난 지금껏 그 상처는 한국 사회를 규정짓는 모순의 뿌리로 버티고 있다. 이 난제를 풀지 못하고는 기왕에 이뤄놓은 정치적 민주화의 기틀마저 흔들릴 터다.

게다가 연말엔 대통령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넓은 틀에서 ‘민주화의 결실’로 이해됐던 참여정부의 집권이 대선을 앞둔 지금 진보·개혁 세력의 ‘지리멸렬한 분열’로 귀결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래저래 내년 한 해는 사회 전반에서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지난 2004년 상반기에 내놓은 통권 12호를 끝으로 긴 동면에 들어갔던 계간 (생각의나무 펴냄)이 복간호를 내면서 ‘거대담론’을 화두로 꺼내든 것은 그래서 시의적절해 보인다.

“거대담론의 몰락 이후 이론들은 오히려 더욱 번창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여성해방, 인종주의, 구미의 문화중심주의, 공동체주의, 환경문제, 차이와 인정의 정치학, 여기에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불가능을 말하는 담론 이론들이 거대담론을 이어 등장했다. 여기에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와 같은 오늘의 국제적인 현실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 그리고 국제적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미국의 신보수주의 또는 이슬람 성전의 이론들을 추가할 수 있다.”

편집인을 맡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의 지적이 아니어도, 대표적 거대담론인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현실적 설득력’을 잃어버린 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선 수많은 ‘국지적 담론’이 홍수를 이뤄왔다. ‘87년 체제’ 20돌과 ‘97년 체제’ 10돌, 그리고 대선이 맞물리는 내년엔 이들 ‘국지적 담론’을, ‘현실의 큰 흐름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으로 모아 세우는 작업이 이뤄져야 할 터다. 은 ‘새로운 대중과 정치적 이성’이란 특집으로 그 고민을 시작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 시대의 논객’을 자처해온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의 글이다. 지난여름 절필을 선언하고 ‘인터넷과 대중’에 대한 고민에 집중해온 그는 ‘디지털 복제시대의 대중’이란 글에서 누리꾼이 갖는 ‘이중성’을 통렬히 논박했다. 이를테면 ‘사적인 개인’은 인터넷이란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적 의미를 갖는 집단’이 됐지만, 역으로 ‘공적인 의미’를 갖는 정치가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 해체되는 ‘포스트모던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선거 때 개혁과 진보를 말하는 대중들도 평소에 제기되는 중요한 사회적 사안에는 무관심하거나, 때로는 그 의제 설정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는 모순된 태도에도 주목한다. 이는 블로그 등을 통해 저마다 자신의 매체를 갖게 된 대중이 ‘감시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뤄내게 됐지만, 이른바 ‘개똥녀’ 논란에서 보듯 “익명성 속에서 책임성을 저버리는 대중들 개개인의 감시의 눈길이 자기들 자신을 향”하는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 것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은 복간호 출간에 앞서 일부 언론이 ‘발췌 보도’한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의 ‘이성과 우상-한국 현대사와 리영희’라는 글 때문에 거센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리영희란 ‘거인’이 남긴 공과에 대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한 번쯤 글 전문을 읽어볼 일이다. 윤 교수의 논리와 그가 ‘사상의 은사’에게 들이댄 ‘비판의 잣대’에 대한 동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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