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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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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의 실태를 들키다

등록 2006-11-30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반이정 미술평론가 http://dogstylist.com

2차원 회화의 조형단위는 점·선·면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러나 3차원 환경에 친숙한 삶에서 점이란 단지 추상적 개념일 뿐이라, 선·면·체(덩어리)가 타당한 해설입니다. 수학적 개념 선은 일상에서 실로 구현되며 이는 다시 직조를 통해 피륙, 이불, 우산 등 실제 우리 앞에 놓인 모든 종류의 사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입니다.

수억 가닥이 모여야 고작 원단 일부를 구성할 따름인 ‘일개’ 실은 때문에 하대받곤 합니다. 의복 위로 튀어나온 실밥은 목격되는 즉시 뽑혀나갑니다. 완성품인 의복에 비해 가느다란 실의 품새가 체통을 세우지 못한다고 믿는 걸까요? 실에 대한 폄하는 ‘인생은 굵고 짧게’라는 인류의 구호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가늘고 길 때 용도를 충족하는 실의 본질은 이런 구호에 정면으로 위배되니까요. 그러나 실의 ‘실태’를 헐겁게 드러내고도 아름다운 것도 존재합니다. 망사이기보다 개별 실들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거미줄은 거주와 포획이라는 생존의 실용과, 미관이라는 가치까지 만족시키는 아름다운 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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