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본위로 추적한 ‘벽’들린 조선 지식인들의 예술과 우정
권혁란/ 전 편집장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조선 선비 이덕무가 쓴, 우정에 관한 아포리즘이다.
“모름지기 산을 뒤에 두르고 시내를 앞에 둔 집을 그려주시게. 온갖 꽃과 대나무 천 그루를 심어두고, 가운데로는 남쪽으로 마루를 터주게. …동편의 안방에는 휘장을 걷고 도서 천권을 진열하여야 하네. 서쪽 방에는 창을 내어 애첩이 나물국을 끓여 손수 동동주를 걸러 신선로에 따르는 모습을 그려주게.” 허균이 화가 친구 이정에게 보냈다는 편지글이다. 잠시 할 말을 잃는다. 아니, 오래오래 누군가와 우정의 깊이와 교유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정민 지음, 푸른역사 펴냄)는 ‘벽(癖)에 들린 사람들’로 시작된다. 말 그대로 어딘가에 미쳐서(狂), 한 경지에 이른(及) 사람들이 있다는 것. 꽃에, 표구에, 책읽기에, 돌에 미친 사람들이 오롯이 이룬 자기만의 세계는 이내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냥 열심히 하다보니 어느 순간 문화가, 예술이, 문학이 된 그들의 벽(癖)은 바야흐로 우리에게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진리를 고요하게 들려준다. 이어 굶어죽으면서까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솟을대문처럼 세워 올린 진정한 마니아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데, 이야기를 전하는 지은이의 마음자리가 더 재미있다.
세상사에 탈진한 작가를 말할 땐 스스로 기진한 듯, 귀양 간 작가의 전전반측의 밤을 말할 땐 스스로도 유배당한 듯 한숨이 깊다. 삶의 속도가 견디기 버거운 듯, 세상의 욕망이 너무 거센 듯 몇백년의 세월을 격해 그들과 동시대의 친구인 양 교감하고 있다. 허균·권필·홍대용·박지원·이덕무·박제가·정약용·김득신·노긍·김영 등의 ‘무릎 꿇지 않은’ 삶, ‘무언가에 미친’ 모습은 마침내 ‘지음’(知音)을 얻었다! 그래, 아름다워 미칠 지경이라니까. 그들의 내면과 우정과 세상의 품은 뜻에 대해 딴지 걸고 싶진 않다. 그러나 미친 척하고 막말을 하자면 남성 지식인들끼리의 ‘동성애’인 듯하지 않나. 더불어 시를 논하고 예술을 논할 자는 무릇 남자여야 한다는 느낌이 물씬물씬 풍기지 않나. 고아한 시에 등장하는 여자라곤 남자친구 얼굴을 한땀한땀 수놓을 ‘여린 아내’거나 동동주를 손수 빚어내야 하는 ‘애첩’일 뿐이다. 간신히, 그야말로 간신히 이 책에 언급된 여자라곤 허균과 교유한 기생 ‘매창’밖에 없다. 출판사 이름처럼 푸른역사, 그 위대한 ‘청사’(靑史)에 기록된 여성이 없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손 쳐도, 여성들의 내면과 우정과 예술이 못내 아쉬운 나는 책을 덮는 즉시 기갈이 들린 듯 뭔가를 찾아 읽는다.
“나는 도를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 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보드랍기 그지없고 감상적이라고 폄하당하는 소위 ‘여류작가’의 ‘지란지교’를 읽고 나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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