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밖에선 ‘글로벌 히스토리’가 확실히 유행이다. 역사 연구의 대상을 특정한 나라나 시기, 혹은 세부 분야로 잘게 쪼개지 않는 게 특징이다. 예컨대 그리스·로마·춘추전국시대(중국)를 날실로 엮어가며 기원 전후 인류 문명의 발자취를 더듬는 접근 방식이다. 두툼한 배포, 원대한 포부만큼이나 트집 잡힐 구석이 한둘이 아니기 십상이다.
어쨌거나 우리 삶의 가장 강력한 연결망이라 할 ‘자본주의’도 글로벌 히스토리의 눈길을 피해가긴 어려웠나보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미국사와 자본주의 역사를 가르치는 지은이 스벤 베커트는 (Global History, Globally)를 공동 편집한 당사자다. “자본주의는 시작된 순간부터 줄곧 지구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투박하지만 명쾌한 알맹이가 이 한 문장에 오롯이 담겼다.
‘정본’에 익숙한 독자에게 들려주는 ‘전사’지은이는 왜 ‘면화의 제국’을 들고나왔을까? 경작지와 공장이라는 두 단계의 노동집약적 생산과정을 거치는 면화는 자본주의의 생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대서양 항로를 타고 전세계에서 영국으로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양의 면화(원료)를 이른 시간 안에 가공해 면직물(제품)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에서 산업혁명이 탄생했다는 게 그간 자본주의 역사를 설명하는 ‘정본’에 가깝다. 인간과 자연의 힘에서 해방된 동력의 혁신과 방적·방직 분야의 혁신이 한데 맞물리면서 18세기 후반 영국 사회는 산업혁명 터널을 통과했다.
이런 식의 정본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에게 지은이는 ‘전사’(前史)를 들이댄다. “자본주의는 공장이 아니라 들판에서 시작됐다”면서. 시야를 영국 공장에만 붙들어두지 말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아시아의 들판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15세기에 본격화한 대항해 시대 개막 이후, 대포로 무장한 상인 세력이 오랜 기간 탄압과 정복, 전쟁으로 축적한 부야말로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젖줄이어서다.
하지만 굳이 글로벌 히스토리 따위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역동적인 생애사를 산업혁명 틀 속에 박제화해서는 안 되는 근거는 차고도 넘친다. ‘생도맹그’를 기억하는가. 오늘날 아이티공화국이라 하는 카리브해의 이 나라는 면화를 재배하기 위해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노역장이었다. 1791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면화 생산지인 이 나라에선 흑인혁명이 벌어졌다. 영국을 정점으로 하는 면화 제국이 휘청였다. 결과는? 서인도제도에서 유지됐던 노예-면화 생산 패러다임은 인근에서 대체지를 찾아야 했다. 신생국 미국에 흑인 노예제도가 급작스레 뿌리내린 배경이다. 자유를 쟁취하려는 흑인 혁명이 또 다른 흑인 노예제를 낳은, 웃을 수 없는 비극이다. 이뿐인가?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의 ‘충격’(면화 기근)을 떠안을 다음 차례의 희생자는 인도였다. 영국이 정점인 면화 제국은 이렇게 생명력을 이어갔다.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을 847쪽의 무게본문만 650쪽(참고 문헌 포함 847쪽)에 이르는 두툼한 이 책은 메마른 이론으로만 다가오던 자본주의의 파란만장한 생애사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글로벌 히스토리 특유의 나열식(늘어놓기) 전개가 내심 불편하고, 책 후반부로 갈수록 뒷심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공장과 철도, 제철소 따위의 혁신적 이미지에 고정된 자본주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픈 유혹을 느낀다면,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을 분량이고 무게다.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morge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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